커피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래 커피 잔 수집을 꿈꿔왔다
하얀색 도자기 잔의 모서리는 금색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고, 용과 방패의 검은색 문양이 금색 테두리 아래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잔에 커피를 가득 채우면 손잡이에 검지를 걸고 들기에 딱 좋은 무게가 된다. 잔 위로 퍼진 향기를 맡으며 한 모금 호로록. 입에 닿으면 도톰한 도자기 잔의 촉감이 커피 맛을 더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구입한 이 커피 잔은, 1960년대에 만들어진 ‘플로렌틴 블랙’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웨지우드 잔이다.
커피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래 커피 잔 수집을 꿈꿔왔다. 그러면서도 잘못했다가 가격이 꽤 나가는 빈티지 잔을 사 모으느라 패가망신을 할 것 같아 늘 망설이기만 했다. 그래서 커피 잔 주변을 맴돌았다. 가령 스탠리 텀블러를 모으는 건, 잔을 사지 않기 위해 애써 노력했던 일 중의 하나다. 학교와 직장에서는 깨질까 봐 마음 졸여야 하는 커피 잔보다 보온과 밀폐가 뛰어난 스탠리 제품들을 더 실용적으로 쓸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도자기를 전공하는 친구에게 커피 잔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거나, 여행 가서 기념 머그잔을 사 모으는 일도 커피 잔에 대한 집착을 분산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어딜가나 아름다운 커피 잔이 있으면 눈이 갔고, 언젠가는 하나하나 소중하게 사 모으리라고 다짐했다.
커피도 종류에 따라 잔을 다르게 쓴다.
가령 에스프레소를 담을 때 쓰는 데미타세(demitasse: 더블 에스프레소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잔은 폭이 좁고 높이가 낮다. 일반적으로 60~90ml의 용량인 데미타세 잔은 두께가 두꺼워 갓 추출한 에스프레소가 금방 식지 않도록 만들어준다.
카푸치노 잔은 보온을 위해 똑같이 두껍게 만들어졌지만, 우유가 들어가야 하기에 데미타세 같은 에스프레소용 잔보다 폭이 넓고 잔의 용량도 큰 편이다. 주로 드립커피를 따라 마시는 도자기 커피 잔은 에스프레소 잔보다 두께가 얇은 편이다.
소서(saucer)라 불리는 잔 받침에 섬세한 무늬 혹은 패턴이 그려진 잔을 세트로 한 것을 함께 ‘커피 잔’이라고 하는데, 이 잔들은 입에 닿을 때의 감촉이 좋고 향을 퍼뜨리기에도 좋다. 향을 적극적으로 즐기는 차를 담는 찻잔과 비교하면 이해가 쉬운데, 찻잔은 커피 잔보다 두께가 훨씬 얇고 입구가 넓어 향을 퍼뜨리기에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커피를 담기 위해 잔을 사용하는 데에도 정해진 법칙은 없다. 가령 우유가 들어간 커피라고 해서 꼭 카푸치노 잔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플랫화이트라는 메뉴는 종종 유리잔에 담기도 하는데, 용량이 작아 오래 두고 마실 필요도 없고 보기에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카페에서는 커피 잔 대신 얇고 넓은 찻잔을 사용하기도 한다. 커피의 향을 제대로 즐길 수도 있고, 식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칠맛과 산미를 즐기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카페에서는 커피를 빠르게 식히고 향을 강조하기 위해 와인 잔에 커피를 따라 주기도 한다. 이처럼 잔의 구조와 용도를 잘 활용하는 바리스타들은, 자신이 만든 커피의 특성을 파악해 그 맛과 향을 잘 살릴 수 있는 잔을 선택한다.
좋은 잔 혹은 용도에 알맞은 잔에 내준 커피가 꼭 맛있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잔이 주는 기쁨도 커피를 만드는 일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바리스타의 커피는 높은 확률로 맛있을 것이다.
반대로 관리가 쉽다는 이유로 똑같은 디자인의 잔을 용도 구분 없이 쓰거나,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흠집이 많이 나 있는 잔을 내주는 카페의 커피는 맛없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잔을 관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잔 흠집이 나지 않게 잘 닦아주어야 하며, 닦고 난 후에는 물때가 남지 않도록 린넨 천으로 남은 물기까지 닦아주어야 한다. 오래 사용하지 않는 잔들에는 먼지가 쌓이기 마련인데, 시시때때로 잔을 닦고 색이 바래지 않게 관리해야 손님이 왔을 때 깨끗한 잔을 내줄 수 있다.
이렇게 잔에까지 신경 쓰는 매장들은 종종 잔은 물론이요 소서까지 예열해 커피를 내주곤 한다. 따스한 커피의 온기가 손을 통해 먼저 전달되면, 커피의 향기는 더욱 깊어지게 마련이다.
커피를 사랑하는 바리스타들만큼이나
애호가들 또한 잔에 애착이 크다
나를 처음 커피에 빠지게 만들었던 공간들은 항상 오래되고 멋드러진 잔을 따뜻하게 데워서 커피를 내주었다. 이대 앞에 있었던 비미남경이나 고대 후문에 있었던 카페 보헤미안이 그랬다. 금색 테두리에 용무늬가 그려져 있는 웨지우드 잔처럼, 그 시절에 마셨던 잔들은 전부 어떤 사연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법한 예쁜 잔들이었다.
진정으로 커피를 사랑하는 바리스타들만큼이나, 커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덕후들도 커피 잔에 대한 애착이 클 수밖에 없다. 집에서 커피도 볶고 직접 내려 마시는데 좋은 잔이 없으면 화룡점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에둘러 커피 잔을 사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과감하게 돈을 쓰는 만큼 멋진 핑계를 마음에 두어야, 가벼운 지갑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이 조금은 평온해질 것 같아서다.
뱀발.
<커피 생활자의 탐구일기>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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