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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irut Apr 23. 2019

고종이 마신 커피를 생각하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그곳의 커피는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헛헛한 속을 달래주었을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모름지기 커피를 좋아하는 일에서도 그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의무감으로 커피 역사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사료들을 찾다 우리 커피 역사의 한 모습을 발견했다. “경식당을 오픈했습니다. 홍릉역에서 가까운 이곳에는 커피와 코코아를 비롯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1899년 《독립신문》 영문판에 윤용주라는 사람이 실은 광고다. 전차가 도시를 누비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역전 다방이 등장했고,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를 그곳의 커피는 전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헛헛한 속을 달래주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를 고증할 만한 사료는 참 부족하다. 때문에 우리나라에 언제 커피가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첫 커피로 알고 있는 고종의 커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엄밀히 말해 고종이 마신 커피는 우리나라의 첫 커피가 아니다. 또, 아관파천(1896~1897)의 혼란 속에서 과연 그가 커피를 마셨는지, 덕수궁 정관헌이 정말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던 공간인지에 대해서도 누구 하나 확답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나라 커피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영국인 선교사가 1885년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집에 초대받은 일화를 기록한 《조선풍물지》(W. R. 칼스, 1885)다. 이후 독립신문 영문판에 처음으로 ‘자바 커피’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 1897년이고, 전차가 깔리던 시점에는 역전 다방도 문을 열어 위와 같은 광고도 하게 된 것이니, 우리나라에 처음 커피가 등장한 시점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마셨던 때보다 훨씬 이를 것이다.  


푸른빛을 품어 덕수궁의 여러 건축물 속에서도 눈에 띄는 정관헌에 대한 기록 또한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 고종이 외국 대사들과 연회를 즐기며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를 확인할 마땅한 사료가 없다. 정관헌이 연회를 즐기는 장소가 아닌 어진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아랍인들로부터 커피 묘목을 빼내 유럽의 커피시장을 주도했던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아낌없이 자본을 투자했던 네덜란드 덕분에, 자바는 당시 최고의 커피 산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초, 자바의 커피 농장에는 녹병이 돌기 시작했고 줄어든 아라비카 커피의 생산량을 로부스타 커피가 대체했다고 한다. 커피가 처음 발견된 에티오피아의 토착종들을 포함하는 아라비카종에 비해 콩고의 기슭에서 발견된 로부스타종은 향미가 많이 부족했다. 그래도 병충해에 강하고 낮은 고도에서도 잘 자라니, 아라비카가 물러난 자바 섬에서 자리를 차지한 건 단연 로부스타 커피였다.     


점점 늘어나는 커피 수요를 감당하기에 자바 섬에서 재배하는 커피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식민 지배를 둘러싼 복잡한 현지 상황도 자바를 최대 커피 산지의 지위에서 밀어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다른 대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가능한 브라질이 전 세계 커피 수요를 충당했다. 커피가 자라기에 알맞은 자연환경과 커피 재배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 당시의 정치 상황 때문에 1906년을 기준으로 브라질의 커피 생산량은 세계 전체 교역량의 97%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온몸에 천천히 퍼져나가는 카페인의 기운에
사람과 사람 사이, 커피가 퍼져나갔으리라


홍릉역 역전 다방에서 마셨을 그 커피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커피가 들어와 퍼질 무렵 병충해를 이겨내고 다시 커피를 수출하기 시작한 자바와 새로운 커피 수출 강국으로 자리 잡은 브라질의 구수하고 씁쓸한 커피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고종은 커피 마시기를 즐겼다고 한다. 잘 정제된 지금의 커피와는 다르게 투박한 맛이었겠지만, 염소도 춤추게 만들었던 카페인의 힘은 통치의 고단함에 어깨를 짓눌리던 고종의 마음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어렵사리 구한 로부스타 커피를, 또 브라질산 커피를, 각각 프렌치 프레스에 내려본다. 두 커피 모두 구수하고 씁쓸하여 누룽지의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잔을 따라 전해지는 온기에 마음은 한 뼘 누그러진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나라의 운명에 고심했을 고종의 커피를 생각해본다. 또 밀어닥치는 변화에 혼란스러웠을 서울 사람들이 전차를 기다리며 마셨을 커피 맛을 상상해본다. 커피 한 잔의 위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한 모금 넘기면 온몸에 천천히 퍼져나가는 카페인의 기운에 사람과 사람 사이, 커피가 퍼져나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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