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사일기

[퇴사D-245]저녁이 있는 삶도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by 망샘
5시 퇴근, 자유로운 근무유연제 사용, 사내 어린이집, 강제적 야근없음, 나쁘지 않은 월급과 복지

.

.

.

처음 사회초년생으로 입사했을 땐 온몸에 전율이 돌 정도로 감사했던 근무환경에 익숙해지는 건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의는 늘 있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 남은 건 불만과 한숨뿐이었다.

6시만 되어도 텅 비어있는 사무실이 다른 회사에서는 언감생심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한 때 나는 이런 말을 하고 다녔더랬다.

우리 회사에 사내 어린이집이 생기기만 한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회사에 충성할거야


그런데 정말 그 '어린이집'이 생겨도 나는 여전히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를 갖고, 열 달을 소중히 품어 출산을 하고, 어린이집에 보내기까지 1년을 키워야 하는 과정부터 '회사원'으로서 잘 헤쳐갈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82년생 김지영까지는 아니어도 여전히 임신과 출산, 육아에 긴 휴가를 쓸 수 없는 89년생 김지영이니까.





세계여행을 가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며 회사에 사표를 내고 여행길에 오른다.


'야근을 하느라 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요'
'결혼을 하고 같은 집에 사는데 주말이 아니면 볼 시간이 없어요'
'매일 야근하고 돌아오면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어요'
'주말에는 밀린 집안 일, 양가 대소사를 챙기고,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 시간이 다 가요'



저마다의 이유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저녁이 있는 삶'을 외치며 퇴사를 하고 세계여행길에 올랐다.

하지만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있는 데도 왜 만족하지 못하고 떠나고 싶어 하는 걸까? 배가 부른걸까? 아직 사회의 쓴 맛을 못 본 꼬맹이라서 순진한 소리를 하는 걸까? '이런 회사 없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만' 나는 늘 떠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저녁이 있는 삶도 나에겐 충분하지 않았다.




저녁이 있는 삶


보통 6시 전후로 퇴근을 하면 운동을 하고, 밥을 해먹고,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일찍 잠들었다. 심지어 일과 중에도 크게 급한 일이 없으면 동료들과 30분, 1시간 커피를 마시고 오는 사람들도 많아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다. 남편 또한 일과 중에는 화장실도 잘 못 갈 정도로 치열하지만 야근은 많이 없는 편이라 우리 부부는 저녁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친구들을 만날 손 치면 5시에 끝나는 나는 운동을 하고 가거나 미리 근처 핫한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며 1~2시간을 보내고나서야 퇴근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이 것이 선망받는 삶이고, 여행을 다녀오면 이런 삶은 다시 못 살 수도 있겠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나고 싶다.



헐렁한 일과를 보내며 헐렁한 어른으로 커가는 게 무서웠고,

할 일이 많지 않아 남에게 관심을 쏟으며 남 얘기로 입방아를 찧는 꼰대가 되어가는 것이 싫었고,

지금하는 일이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후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아 두려웠고,

치열하게 살아도 부족한 젊음을 느슨하게 낭비하는 것이 우려스러웠고,

전세 집 대출 갚으면 또 다시 빚을 내어 큰 집으로 옮기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 빚을 내어 학군이 좋은 동네로 옮기며 또 빚쟁이가 되어 회사에 어쩔 수 없이 충성할 수 밖에 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고,

나중에 태어날 아이의 대소사를 모두 함께 할 수 없는 대기업 직장인 아줌마가 될 것 같아 걱정이고,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나를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세상에,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사람도 이렇게 불만이 많다.





그러니 나는 꼭 떠나야만 한다.


덧, 이 여행이 신데렐라 호박마차처럼 내 인생을 '뿅' 바꿔주지 않을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이 있는 삶은 전부가 아니다.




결국 내린 결론은, 내가 이번 여행에 일생일대의 기회라느니, 다시없는 도전이라느니 하며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는 사실이었다. 떠나오기 전 나는 정해진 루트만 오고 가는 시계추였고, 정수리에 붙은 줄을 떼어내고 시계 밖으로 나가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막상 세상 밖으로 나오니 어떠했던가. 내가 그토록 전전긍긍했던 모든 건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결국 그저 흔해빠진 세상사일 뿐이었다.

엄청난 걸 내려놓고 떠나왔다 생각했거늘 막상 떠나보니 별것 아니었다.
언제고 이 도시에 산책하듯 다시 발 딛을 날이 다시 올 거고, 삶에서 여행은 그런 사소한 사건이어야만 한다.

[출처]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여행에세이/런던에세이/홍인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