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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Jul 16. 2020

굶어보니 어른이다

문득 나이를 실감할 때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지 네 달이 지났다. 벌써 올해의 절반도 지났고 나는 아직 서른둘 백수다. 가끔 친한 동생들 나이를 듣고 마냥 어리지 않은 숫자에 놀란다. (동생들 나이보고 놀라면 내 나이는... ) 마냥 이십 대 초반일 것 같았던 그들이 벌써 서른이 지나고 결혼을 한다.


사실 여행을 다녀와서는 나이에 무감각해졌다. 서른둘, 아직 너무 어리잖아? 서른 살은 ‘이립’이라던데 단단하게 서기는커녕 지금도 자주 흔들린다. 그럼에도 문득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할 때는 잦은 경조사도, 회사 다니는 친구들이 과장님이 됐다는 것도 아니다. 바로 끼니를 거르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그다지 괴롭지 않을 때 나는 제법 어른이 된 기분이다.

아침밥은 꼭 먹어야 한다는 엄마 딸로 삼십 년 살면서 아침은 물론 삼시 세 끼는 절대 거를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이었다. 한 끼만 먹지 않아도 신경질적인 반항아로 돌변하거나 힘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줄 알았다.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밥은 꼭 먹고 다녀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일 년 중 가장 걱정되는 날은 바로 건강검진이었다. 근심의 원인은 수면 내시경, 채혈, 치욕적이고 아픈 산부인과 검사도 아닌 공복이었다.

어떻게 아침밥은커녕 물도 안 마신 채로 병원까지 오라는 거지?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병원 가는 길에 쓰러지는 거 아닌가? 공복의 두려움은 그렇게나 컸다.

그런 내게 굶으며 하는 다이어트는 차치하고 주위에서 성공한 간증이 많이 들려온 간헐적 단식도 보기에 없었다. 차라리 운동을 세 시간하고 말지 굶는 건 절대 못했다.(그래서 살이 안 빠졌구나)
그런 내가 요즘 아침 7시부터 두 시간 동안 하는 요가, 명상 수업에 나가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가기 바쁘니 아침 식사는 당연히 거른 채 말이다. 여행을 하며 인도에서 아침 수련을 해보니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능한 행보다.


강렬한 인도의 기억
인도 마이소르


마이소르에서 듣는 아쉬탕가 수업
여기도 믿기지 않겠지만 인도


세계여행이랍시고 떠났는데 인도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끝까지 고민했다. 더럽고 사기꾼 많은 인도지만 인도병에 걸린 주변인들의 간증을 듣고 용기를 냈다. 그런데 요가가 좋아서 인도에 오긴 했는데 아쉬람에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떠난 여행에서 나를 가혹하게 몰아넣기 싫었다. 결국 인도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했던 신축 게스트하우스에서 편하게 머물며 아침 9시 하타요가 수업만 들었다. 주방이 없어 미리 아침거리를 사놓을 수도 없어 늘 바나나 혹은 사과 한 알을 먹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밤에는 위험해져 저녁을 6시 이전에 챙겨 먹었고 요가 수업이 끝나면 11시 즈음에 아침을 먹었다. 의도치 않은 간헐적 단식을 하게 된 것이다.

요가원까지 걸어갈 힘도 없을 줄 알았다. 아침을 안 먹고 어떻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반전은 막상 해보니 요할 때 힘도 빠지지 않았고 허기도 크지 않았다. 너무 신기했다. 굶어도 괜찮은데 심지어 강도 높은 운동을 해도 괜찮잖아? 서른 넘어 처음으로 해 본 경험이었다. 당연한 줄 알았던 게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해보니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막상 해보니 가끔 꼬르륵 소리가 나려 했지만 호흡을 하고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허기는 다스려졌다. 식사를 하고 요가를 하면 트림도 나오고 몸을 앞으로 숙이는 전굴 자세를 할 때마다 부대꼈다. 그런 불편함 없이 공복에 하는 요가는 더없이 가벼웠다. 두 시간이 지나고 나와 드디어 아침을 먹으며 나는 한 뼘 더 어른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인도에서 굶어본 경험 덕분에 한국에서도 이제 무리 없이 끼니를 거르곤 한다. 물론 안 먹는 게 아니라 평소보다 늦게 먹거나 간단히 먹는 정도지만 이것도 장족의 발전이다. 남이 시키지 않아도 좋아하는 요가와 명상을 위해서 새벽에 알람을 맞추기 시작했다.

운전을 능숙하게 하고 돈을 많이 번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둘 다 못하지만) 또한 회사원이 되어 국가에 세금을 낸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님을 안다. 당연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을 하지 않아도 막상 괜찮다고 아는 게 많아질수록 어른에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그러다 보면 옛 조상님들이 서른이라면 마땅히 돼야 할 ‘이립’의 상태에도 근접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아직 어린 서른둘에 나는 조금씩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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