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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Nov 17. 2020

제주에서 일 년이나 살게 됐다

이게 다 날씨 때문이다

퇴사하고 세계여행 종료 D+238, 내가 제주에서 살게 되다니...


세계여행과 별개로 제주 살이에 대한 해소되지 않는 로망이 있었다. 제주도는 평일 하루를 연차로 내고 금토일 혹은 토일월 두 밤을 자고 오는 식으로 다녀온 게 전부였다. 늘 먹어야 할 것, 가고 싶은 곳을 도장깨기 하듯 가느라 바빴다. 한 곳에 진득이 앉아 멍을 때릴 여유는 사치였다. 그럼에도 제주는 가도 가도 좋았다. 결국 일 년을 살게 됐다.


제주에 도착하고 이틀 후 카페에서 아래 글을 썼었다. 이때만 해도 '조금 긴 여행 기대된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정도였지 일 년 살 집 계약서를 쓰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https://brunch.co.kr/@bellakwak/215



그렇게 보름이 지나고 우리 부부는 두 손에 계약서를 쥐고 다시 김포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저 조금 긴 여행을 하려던 게 일 년 살기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이게 다 지내는 내내 날씨가 좋았던 탓이다. 그리고 보름간 머물던 공간때문이었다. 같은 시기에 세계여행을 했던 부부 여행자가 이제 갓 제주살이를 시작한 곳에서 지내며 그들과 많은 밤동안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이 동했다. 여행을 하며 만난 적은 없지만 이제서라도 인연이 되어 참 좋다는 생각이 들게 한 두 분을 보면서 우리도 일 년 동안 이렇게 살아봐도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집 구경하는데 돈 드는 건 아니니까 하나둘 재미 삼아 집을 알아보다가 일이 커졌다. 덜컥 계약금을 입금하고 계약서까지 쓰게 된 것이다.


열한 곳의 집을 구경했고 그중 마지막 집을 운명처럼 만났다. 그 와중에 부동산 사기를 당할 뻔하기도 했다. 계약 직전까지 갔으나 등기부등본이 이상해 계약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여행만 하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라는 계시인가 보다. 마음을 접었다 이내 다시 오일장 닷컴 사이트(제주도의 '직방'같은 사이트)를 기웃거렸다. 자기 전까지 보고 일어나서도 봤다. 하도 많이 봐서 그 집이 다 그 집 같아 보이기 시작할 때쯤 남편이 자고 일어나 눈도 게슴츠레 뜬 나에게 핸드폰 액정을 얼굴에 들이댔다. 이 집 네가 완전히 마음에 들어할 거라며 잔뜩 신나 했다. 어젯밤 제주살이 카페에 정보를 얻으려 등업 하기 위해 글 2개를 써야 해 우리의 상황을 써서 대충 올렸는데 그 글을 보고 쪽지를 주셔 알게 된 집이라 했다. 부동산 소개로 봤던 여타 다른 집과는 달리 본인들이 직접 지어 살고 있던 집이었다. 육지에서 일하게 되어 잠시 내놓는데 홈페이지까지 만든 정성에 그들의 집은 보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돌담부터 사랑에 빠졌다
얘도 두고가시면 안될까요?ㅠㅠ






알콩달콩하게 지낼 수 있는 부부가 왔으면 좋겠다는 소개글에 이거 딱 우리네, 느낌이 왔다. 사진을 보니 남편의 확신대로 인테리어와 집 위치까지 모두 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찾던 집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약간 비싼 감이 있어 마음을 주지 않았다. 견물생심을 믿는 나는 아예 보지도 말자 했지만 그래도 연락을 주셨으니 구경만 해보자며 제주를 떠나기 이틀 전 그 집을 방문했다.



귤나무와 매화나무가 있는 마당에 발을 디딜때부터 좋았지만 현혹되지 말자 다짐했다. 주인 내외가 문을 열고 맞아주시는데 집 전체를 감싸던 은은한 향과 잔잔한 음악에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사랑스러운 스코티시 스트레이트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이 집의 화룡점정이었다. 두 분의 반려묘로 우리 둘은 바로 K.O.당했다. 첫 눈에 반해버렸다. 차 한잔 마시고 가시라는 근래에 보기 드문 집주인 덕에 찬찬히 집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사진보다 훨씬 좋던 인테리어가 눈에 쏙쏙 들어왔다.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했는데 역시 두 분은 디자이너였다. 방 하나부터 마당과 창고까지 두 분의 세심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처럼 제주도 한 달 여행을 왔다 일 년을 살게 되고 땅을 사서 집까지 지어 5년을 살게 됐다는 부부는 인상도 참 좋으셨다. 게다가 부부가 함께 요가 수련을 하고 있었고 세계여행을 가고 싶어 하셔 우리가 나눠드릴 이야기도 많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마음을 홀딱 빼앗겼다.



월세, 기회비용 등을 차치하고 취향이 맞는 부부의 공간에서 일 년을 살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 자주 찾아올까. 하고 싶은 것만 해도 짧은 인생이니까 우리의 젊은 날을 제주에서 보내보기로 했다. 월세로 환산하면 조금 비싼 감이 있지만 연세로 보면 줄을 서서 산다는 명품 백 하나 가격이다. 가방 하나 살 가격에 이 멋진 공간에서 일 년 동안 살 수 있다니 그걸로 됐다. 마당도 넓고 고양이를 키우시길래 혹시 사모예드를 키워도 괜찮냐고 여쭤봤다. 우리가 가진 예산보다 조금 초과해서 혹여 조금 깎아주실 수 있는지도 함께. 사실 두 가지 모두 싫다 하셔도 우리는 이곳에서 살겠다고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고민하시는 하루 동안 혹시 다른 분과 계약하셨을까, 그냥 들어오지 마세요 하면 어떡하지 오만가지 가정을 했다. 소개팅을 하고 마음에 든 상대방의 연락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카페에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커피를 마시고 있던 때 띵동! 문자가 왔다.


“우오오오 문자 왔다!” 얼굴이 화색이 돈 채 남편이 외쳤다.


“오오오오 뭐라고 하셔?” 그의 표정을 보니 긍정적인 것 같아 들떴다.


“강아지 키우는 건 어려울 것 같다시네. 그런데 월세는 10만 원이나 깎아주셨어!!!”


대박이었다. 우리는 안 깎아주셔도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귀인을 만났다. 시간 괜찮으면 계약서 쓰면서 저녁 한 끼 하자는 초대까지 해주신 대인배. 참 좋은 집주인을 만난 것 같다. 그 날 저녁 바로 계약서를 쓰러 갔다. 어제는 차를 얻어 마시며 두 시간 넘게 수다를 떨었는데 오늘은 저녁까지 얻어먹으며 세 시간을 있었다. 두 번째 본 집은 더 예뻤다. 게다가 계약서를 쓰다 집주인 분과 성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흔하지 않은 성이라 계약서만 보면 마치 가족끼리 계약한 느낌이었다. 좋은 언니가 생긴 기분이다. 늘 아빠나 남편 아래 세대원으로 들어가 있다 처음으로 세대주가 되어 내 이름으로 된 계약서를 썼다. 그것도 주소가 제주도라니. 마스크를 넘어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2021년을 온전히 제주도민으로 보내게 됐다.



이렇게 삶은 의지와 우연이 뒤섞여 우리를 재미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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