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나는 뿌리까지 말라비틀어졌지만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암 진단을 받고 수술, 항암, 방사치료를 힘겹게 마쳤던 나는, 암 치료 이후 180도 변화한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지난 1년 간의 질병 휴직을 마치고 돌아온 사무실 책상에는 대체 근무자가 두고 간 스투키(다육이) 하나가 놓여있었다. 뜻밖의 선물에 당황하길 잠시, 내 생애 처음으로 식물을 길러보기로 했다. 그렇게 내 변화를 직접 증명하리라 다짐했다.
스투키를 기르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물 주기. 그리고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스투키와 제법 친해져 식물 초보자로서의 '스투키 기르기 노하우'를 찾아낼 수 있었다.
'화분 크기에 맞춰 '적당히' 물 주기.
월 초에 '주기적으로' 물 주기.
그리고 위 방법들대로 '꾸준히' 물 주기'와 같은 것들이었다.
간단해 보이지만 중요한 노하우였다.
너무 많은 물을 주면, 흙은 물을 꾸역꾸역 삼켜내다 못해 토해내어 순식간에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곤 한다.
물 주는 시기를 특정 시기로 정해두지 않으면 한 달을 거르기 일쑤다.
그리고 위 두 개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어느덧 속 빈 줄기를 마주하기 마련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내 스투키는 어느덧 분갈이를 고민할 정도로 자라났다. 스투키를 기르기 위한 나만의 노하우는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스투키를 통해 변화를 증명하려 했던 내 다짐은 꽤나 성공적 이어 보였다.
적어도 기분 좋게 떠난 가족 여행에서 서로 큰 소리로 싸우고 말 한마디 없이 집에 돌아온 그날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지난 암 치료를 통해 180도 변하리라 다짐했다. 과거에 가족(정확히는 아빠)으로부터 받은 크고 작은 상처는 덮어버리고, 살아 있는 현재와 그 옆을 지켜주는 가족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그동안 작은 마찰은 있었지만 그렇게 살아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또다시 가족에게 분노하고, 자괴감에 울다가 허탈함에 웃는 지금의 내 모습은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가족이랑 잘 지내보고 싶었던 내 목표가 그렇게 허황됐던 건가?
남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해 보여서 갖고 싶었던 그 일상이 내게는 너무 과분했던 건가?
헛헛한 마음에 괜스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나는 뿌리까지 말라비틀어져, 아무리 물을 줘도 물기는 순간이고 또다시 메말라 버리는 사람은 아닐까. 나를 감싸고 물을 머금을 흙조차 내겐 과분한 거 아닐까.
그렇다면 스스로를 포기하는 게 내게 남은 유일한 변화일까.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반복하는 마른 뿌리 옆에, 있는지도 몰랐던 연초록색 새순이 나와 불쑥 말을 걸었다.
"포기하긴 뭘 포기해. 기댈 구석 하나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기댈 구석은 나뿐이었는데,
가진 거 하나 없어도 유일하게 가진 게 나뿐이었는데. 내가 왜 포기해?"
그 마저도 내면의 반골기질이었고, 하나 가진 몸 뚱아리도 세포분열 실패로 암에 걸렸다 회복한 지 얼마 채 되지도 않은 내면의 몸부림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와닿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 그래도 나한텐 내가 있었지. 암 치료도 이겨냈는데, 내가 못 이겨낼 게 뭔데?
목표가 잘못된 건지, 방법이 잘못된 건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
그래도 나한텐 가장 든든한 내가 있잖아.'
슬픔 어딘가에서 올라온 자기애가 나를 응원하고, 나는 그 자기애의 손을 잡아보기로 했다.
나는 평생 나 스스로를 외면하고, '평균적 인간'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어릴 때 내가 그린 그림, 내가 쓴 편지는 반 전체에 떠돌아다니며 철없는 아이들의 이유 없는 놀림감이 되었다. 직장에서 친구라고 자칭하던 지인은 내가 용기 내 올린 글을 보고 장난 삼아 캡처했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는 척하고, 그림을 그리지 않는 척하고, 글을 쓰지 않는 척하며 살았다. 학업, 성적, 대학, 직장 같은 다수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살아내며, 스스로로부터 나 자신을 지워왔다.
매월 초 스투키에게 물을 주던 나는, 정작 그보다 오랜 시간 메말라온 나 자신에게는 물을 주지 않았다.
식물 한 번 길러본 적 없던 내가 길러온 스투키처럼, 나도 나를 기를 수 있을까.
완벽하지도 않으면서 완벽해지고 싶고, 자기 검열로 밤을 지새우고, 누군가를 사랑하다가도 미워하는 못난 나도 언젠가 물기를 머금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제부터 내게도 물을 줘 보기로 했다. 내게도 적당한 양의 물을, 주기적으로, 꾸준히 줘 보기로 했다.
그동안 귀 기울여주지 않았던 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고, 소리 없이 뒤엉켜온 내면의 분노, 슬픔, 좌절에 손 내밀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 지금의 내 모습을 좀 더 사랑해 보기로 했다.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내 삶이 그 증명이 되어, 내게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순간이나마 삶에 희망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