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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별 Jul 15. 2024

악성종양 의심소견, 눈 감으면 없던 일이 될까

내가 모르던 중대한 질병과 직면하게 될 두려움은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

건강검진에서 악성종양 의심소견을 받고, 동일 병원의 외과에 전화를 걸어 조직검사를 예약했다. 그 병원은 2주 후에야 조직검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2주 후라니,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닌가 걱정되면서도 그저 기다려보기로 했다. 우선 초음파를 봐줬던 그 병원에서 검사를 해야 좀 더 정확한 결과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병원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제일 크고 시설이 좋은 병원 중 하나였다. 이보다 좋은 병원을 찾아보고 빠른 예약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건강검진을 했던 병원에 들러 의뢰서와 영상자료를 받아야 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직 한지 2개월 된 회사에 적응 중이던 내게 근무시간 중 병원에 들를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질병의심 소견으로 혼란스러운 내게 그 이상의 에너지 또한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평소 여러 상황을 고려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선택지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물건을 살 때에도 내게 가장 적절한 성능을 가진 모델과 가장 합리적인 가격을 찾았다. 언제나 더 좋은 걸 찾으려고 노력하는 내게 그에 투입되는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정보가 많을수록, 아는 게 많을수록 최선의 선택지는 늘고, 누릴 수 있는 혜택도 많아졌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의 나였으면 분명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더 빠른 시일 내에 조직검사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아봤을 것이다. 그렇게 다른 병원을 찾아 예약했으면 아마 더 빨리 조직검사를 받을 수 있고, 진단도 더 빨리 받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이직한 지 얼마 안 된 신규 직원이었다. 세 번의 도전 끝에 합격한 이 회사에서, 경력 있는 신입직원으로서 열심히 그리고 잘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능력 있는 직원이 되기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괜찮은 직원 정도로는 인정받고 싶었다.

부모님에게는 더 좋은 회사에 다니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나는 평생을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어렸을 때는 본인을 닮아 예쁘다고, 손가락과 팔이 길다고 칭찬받았고, 커서는 공부를 잘한다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칭찬받았다. 그 칭찬이 낯간지러우면서도 듣기 좋아서 계속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남자친구에게는 흠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사귄 지 2개월 만에 결혼을 노래하던 당시의 남자친구는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불안정한 가정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여자친구가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는 상황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는 2주 내내 불안했다. '내 나이에 무슨? 가족력도 없는데 그럴 리가? 아닐 거야.'라는 말을 속으로 수차례 되뇌면서도, 한 편으로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만약 암이면 어떡하지.' 조직검사를 빨리 받으면 그 고민의 시간도 줄어들었을 것인데, 조직검사 일정을 늦게 잡아주는 병원만 애꿎게 탓하며 마냥 기다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병원에 가야 함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걸 잘 아는 건 환자 본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모르던 중대한 질병과 직면하게 될 두려움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당시의 나는 내 병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기다리는 시간이 곤욕임을 알면서도 그 시간을 꿋꿋이 버텨냈다. 하루라도 늦게 알게 되면 적어도 지금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2주 뒤 조직검사를 받았다.

그때로 돌아갔으면 조직검사를 일찍 받았겠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 불안감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지금의 나라면, 돌아가서 그때의 나를 꼭 안아주고 말해주고 싶다.

불안한 거 다 알고, 한동안 불안할 것도 알아. 그런데 괜찮아. 치료받으면 돼.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어느 정도는 아프고, 너는 그걸 조금 빨리 겪은 것뿐이니까. 그러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 대신 너를 지금보단 조금 더 믿어줘.
너는 잘 이겨낼 수 있어. 내가 다 봤어.


돌아갈 수 없으니 눈을 감고 그곳에 돌아간 상상을 해 본다.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초음파실 앞에 앉아있는 내 옆에 앉아, 눈을 마주치다가 꼭 안아주는 상상. 냉기에 몸서리치던 나는 나를 둘러싼 체온을 느끼며 그제야 소리 내어 울었을 것이다. 겉으로 완벽해 보이려고 억누르는 게 너무 많았던 나. 나 스스로도 돌봐주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그럴듯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아닌 '나를 믿어주는 나', 그때 내게 없던 내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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