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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별 Aug 12. 2024

2-4 암 진단을 받은 날 나는 울지 않았다

의사가 암이라면 암인 거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조직검사 결과 진료일-그때까지도 내가 암일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보호자와 함께 오라는 간호사의 권고를 따라 부모님 두 분을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다. 최근 대규모 인테리어 공사를 마쳐 따뜻한 조명이 내리쬐는 대기실 앞에 앉아 약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잠시, 곧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와 부모님, 그러니까 곧 30을 앞둔 나와 5-60대의 부모님이 함께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그 와중에 다 커서(사실 다 큰지 한참 됐다) 든든하게 부모님을 보호해드려야 할 것처럼 보이는 제일 젊은 내가 환자용 의자에 앉고, 부모님은 내 바로 뒤에 섰다. 이렇게 부모님과 함께 동시에 진료실에 들어온 건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 아니었을까. 진료실은 이렇듯 북적였으나 우리는 인사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사가 곧 화면에 띄워진 초음파 영상과 진료차트를 가리키며 정적을 깼다.


“조직검사 결과상 침윤성 유관암입니다. “


말문이 턱 막혔다. 당연히 별 것 아니고, 기껏해야 양성종양 일 것이라 생각했던 기대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그동안 나는 현실이 두려워 타조처럼 고개를 땅에 박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그 현실이 나를 피해 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머리 주변의 흙을 성실히 파내어 흙먼지투성이의 얼굴을 꺼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먼지를 툴툴 대충 털어낸 뒤 눈을 마주치고 슬쩍 웃어 보였다. 몸서리치게 두려웠으나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암일리 없다’고 되뇌던 그간의 절대적인 부정, 현실로부터의 도피는 이렇게 끝을 맞았다. 이제 현실을 직시할 차례였다. 그러나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침윤’은 뭐고 ‘유관’은 또 뭔가? 속으로 온갖 질문이 솟아올랐으나, 그러니까 결국 ‘암’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암’이 정확히 뭐지? 지금껏 암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알아본 적도 없었다. 이렇듯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으나 설명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추가 검사에 따라서 유방을 전절제하거나 부분절제할 수 있는데요, 초음파 상으로 볼 때는 유두에 가까워서 유두도 절제할 수도 있어요. 전신에 전이가 되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요. 말씀드린 사항 확인하려면 MRI, CT, PET CT검사 등이 추가로 필요한데 예약하시겠어요? “

이게 무슨 말이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나라 암 치료 기술이 세계 순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우수하고, 전 세계적으로도 암 치료 기술이 많이 발전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고작 1센티(당시 기준)도 안 되는 암 때문에 가슴이랑 유두까지 절제할 수도 있다고? 그런데 방금 말한 전이는 또 뭐지? 이 나이에 암 걸린 사람이 전이 여부까지 확인해야 하는 거였어? 이렇게 젊은데? 암이 전이 가능성까지 있는 거였어? 그리고 엠알아이, 시티는 들어봤는데 ‘폐 시티’는 또 뭐지? 당시 암 전이 여부를 확인하는 ‘펫 시티‘를 모르는 내 귀에는 폐 시티로 들렸다.


병원에 오는 길에 만약 암이라면 내가 찾아뒀던 빅파이브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부모님과 이야기해 뒀었는데도, 막상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빠는 그런 나를 대신해 타 병원으로 전원 예약을 해보겠다며 나를 진료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부모님과 진료실에 같이 간 덕분에 부모님에게 내가 암이라고 어떻게 말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의사가 암이라면 암인 거고, 이제 내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따뜻한 조명이 내리쬐는 대기실에 다시 앉아, 서울의 주요 병원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 좋게도 한 병원에서 다음 주에 방문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진료의뢰서와 조직검사 슬라이드 등의 자료를 받아 병원을 나섰다.




암 진단을 받은 날 나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나마 악착같이 버텨왔던 삶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죽고 싶던 적도 없었지만, 살고 싶던 적도 없었으니까.

내가 운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 내가 간절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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