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진단을 받은 그날, 나는 난생처음 너무나도 살고 싶어졌다.
과거의 내게 삶이란 '당연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들 그렇지만 나는 삶을 선택하기도 전에 이미 살아 존재하고 있었다. 의식이 생기기 전에도, 그리고 의식이 생긴 후에도 나는 살아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누구도 내게 '네게 삶을 줄 테니 살아보라!'라고 제안한 적이 없다. 누군가 과거의 내게 이렇게 제안했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고맙지만 괜찮습니다.'라고.
나는 강제 부여받은 이 삶의 목적에 대해 오랜 시간 의문을 가졌다. 사람은 왜 태어나고, 왜 살아야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것도 즐거웠지만, 평생을 놀며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저 멀리 흐릿하게 크고 높은 산을 바라보았다. 그 산이라면 불안한 내게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번 태어난 인생, 뜻도 목적도 모르지만 잘 살아내보고 싶었던 나는 그 산에 '미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산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냈다.
그 길은 생각보다 꽤나 굴곡졌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찬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아득바득 살아남고 나면 그다음 길이 이어졌다. 남들은 공부하기 싫다고 싸우는데, 나는 공부하고 싶다고 싸웠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도서관에 갔다. 평범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나는 나 스스로를 부양해야 했고, 특출 난 재능이 없는 내가 살아남을 길은 공부뿐이라고 믿었으니까. 내 눈은 계속 미래만을 향했다. 내 몸은 계속 생존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내게 '존재 자체만으로 소중하다'라고 말해주었으나, 고백하자면 그때의 내게 그 말이 와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태어나는 것부터 나의 선택이 아니었는데, 그마저도 삶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어느덧 삶은 내게 기쁨보다는 고통이 되었고, 종종 누려야 할 권리보다는 해내야 할 의무가 되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한 층 두 층 쌓여가는 무게에 짓눌리던 어느 날엔 '차라리 죽는 게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곤 했다.
그런 내게 암이 찾아왔다. 의심소견과 조직검사 내내 놀라고 두려웠으나, 막상 암 진단을 받고 나서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웃음도 났다.
'암이라고? 까짓 거 별거도 아니지. 이제 이 지긋지긋한 삶도 끝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암에 대해 알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아보니 암은 참 별것이었다.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재도 인류는 아직도 암을 극복하지 못했고, 5~10년 생존율은 극히 높아졌다지만 그래봤자 집계된 건 '5~10년' 생존율이었다. 내 나이 만 29살. 5년 후면 만 34살이었다. 평균수명까지 50년이 더 남아있는데 왜 5년만 집계한단 말인가? 그럼 당연해 보였던 내 남은 오십여 년은 이제 누가 장담할 수 있는 건가.
치료과정은 그 이상이었다.
유방암에는 4가지 종류가 있었다. 호르몬 수용체에 반응하는 '호르몬 양성 유방암', HER2에 반응하는 'HER2 양성 유방암', 호르몬 수용체와 HER2에 모두 반응하는 '호르몬 양성, HER2 양성 유방암(환우들은 '삼중 양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호르몬 수용체와 HER2에 모두 반응하지 않는 '삼중 음성 유방암'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종류에 따라 치료과정이 다 다르지만, 유방암 환자는 대다수가 수술과 항암치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 여기던 많은 것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우선 유방암 환자는 암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서 여자의 상징인 가슴을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잃게 된다. 흉터가 크게 남을 수도, 작게 남을 수도 있으나 아무튼 흉터는 남는다. 가슴을 완전히 제거한 경우 보형물을 삽입할 수도 있으나 완벽한 자연스러움은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림프절 전이 여부에 따라서 림프절을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제거하게 된다. 그에 따라 그 팔은 평생 주의관리가 필요한데, 그러니까 운동을 하거나 짐을 들 때 조심해야 하며 (어느 정도까지 조심해야 하느냐면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채혈하거나 혈압을 잴 때 그 팔을 절대 사용할 수 없다. 혹여 림프부종이라도 생기면 한여름에도 팔에 두꺼운 압박밴드를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항암치료 과정에서 머리카락을 잃는다. 항암치료를 받는 유방암환자라면 예외는 없으며,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미리 머리를 밀고 베개에 떨어진 잔디 같은 머리를 테이프로 떼어낼 것이냐, 미리 머리를 밀지 않고 베개에 떨어진 긴 머리를 훔쳐낼 것이냐뿐이다. 이외에도 여러 부작용이 있지만, 항암치료를 마친 후에도 머리카락이 이전처럼 길려면 최소 2년이 걸리기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상실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걸 알게 된 그날 저녁, 갑자기 숨이 가빠져 왔다. 처음 느껴보는 공포에 숨이 막혔다. 내 발밑을 굳건하게 지탱하고 있던 바닥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둠 깊숙이 가속해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암'은 형벌도 아닌 것을 '선고' 받았다고 표현할 만큼 두려운 질병이었다. 나는 마치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삶을 돌아보고, 과거의 내 행적을 톺아보기 시작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왜 내가 암 진단을 받게 된 거지?'로 시작해서,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때론 하찮게 여겼던 죗값을 치르는 것인가'라며 순응하려다가도, '그런데 누가 내 나이에 삶을 감사하지? 나만 이렇게 산 거 아니잖아'라고 분노하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었다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나를 믿었었다. 믿을 건 나밖에 없었고, 나는 항상 믿음에 어떻게든 부응했으니까. 그런데 내 유전자가 나를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누가 나를 배신해도,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경우의 수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고장 난 DNA를 원망하며 조상님과 친척들의 질병력을 역추적해보았다. 아무리 봐도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사람은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젠가는 암에 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고장 난 세포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해도 해도 너무 하지 않냐. 20대에 암이라니 너무 이르잖아, 이 배신자들아.
누가 천년만년 살겠대? 믿을 건 나밖에 없는데 나마저 나를 공격해?'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 깨달았다. 사실 나는 간절하게 살고 싶었다는 걸.
나는 사실 살고 싶지 않은 게 아니고, '잘' 살고 싶었던 거였다. 그간의 고민은 그저 잘 살기 위한 노력의 부산물이었으며, 그 모든 건 '내가 내 삶을 너무도 사랑해서' 해온 일들이었다.
내게 너무도 당연해 보였던 '삶'은 사실 당연한 게 아니었다. 갖고 싶은 게 많았던 지난 세월 속에서 나는 가장 값진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나는 이제 난생처음, 아니 어쩌면 평생, 너무나도 살고 싶어졌다.
일평생을 목표로 했던 ‘미래’라는 산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산사태에 깔리지 않기 위해 왔던 길로 빠르게 돌아 나와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아득바득 손에 쥐었던 많은 것들을 잃을 예정이었다. 적당히 번듯해 보이는 내 평판, 적당히 봐줄 만해 보였던 내 외모, 적당히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까지,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