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조직검사 그리고 긍정의 탈을 쓴 부정
빨리 오길 바라면서도 영원히 오지 않길 바랐던 조직검사 예약일자가 기어이 다가왔다. 빳빳하고 두꺼운 천으로 만든 가운을 입고 조직검사실 앞에 앉았다. 8월 한여름이었으나 에어컨으로부터 나오는 차가운 바람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그사이 검사를 마친 환자 한 명이 간호사의 부축을 받고 터덜터덜 걸어 나와 바로 앞의 의자에 힘겹게 주저앉았다. 그 환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검사를 앞두고, 그 사람은 잠시나마 내게 조직검사 선배와 같았다. 거즈 위치를 보니 그 선배(!)는 갑상선 조직검사를 한 듯했다. 그 앞에서 허리 숙여 성심껏 주의사항을 설명하는 간호사의 모습이 흡사 아이를 돌보는 어린이집 선생님 같았다. '하루에 만나는 환자가 수십 명이 넘을 텐데 저렇게까지 해줘야 하는 건가? 그런데 엄청 아파 보이긴 하네. 저렇게까지 아픈 일인가? 유방 조직검사도 저렇게 아플까?' 온갖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찰나,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유방조직검사 중 내가 받은 검사는 총 생검(gun biopsy)이었다. 검사 부위에 부분 마취를 한 뒤 병변이 의심되는 부위까지 바늘을 찔러 넣고, 그 부위에 총을 쏘듯 순간적으로 바늘을 찔러 넣었다가 빼는 방식으로 조직을 채취한다. 마취 덕분인지 몸에 바늘이 들어오는데도 아프기보다는 이물감이 들었다. 이 이상한 물체를 한시라도 빨리 빼내고 싶을 뿐이었다. 이물감의 절정은 총을 쏘기 시작할 때였다. 총을 쏠 때마다 이물감이 강해졌다. 내 몸을 바늘로 작게 갉아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 이물감을 참기 힘들어 총 쏘는 횟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숫자를 세며 여섯이 되기만을 바랐다. 검색포털 너머 이름 모를 의사가 총생검은 여섯 번 정도 시행한다고 했으니까. 그럼 여섯 번째에 끝나야 하는 거 아닌가? 내 기대를 비웃듯 검사는 여섯, 일곱을 넘어 무려 열넷을 세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아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났다. 어두컴컴한 검진실에 맨 몸으로 누워 팔 한쪽을 올리고, 이름도 무서운 기기(‘총’이라니)에게 속절없이 조직을 내어주고 있는 나 스스로에 대한 연민으로 설움이 복받쳤다.
조직검사 직후에는 온갖 불안한 상상으로 무섭고 서럽고 괴로웠으나, 놀랍게도 그 모든 걱정은 두어 시간 뒤 부지불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대신 ‘난 절대 아닐 거야’라는 절대적인 부정이 시작되었다. 나를 방어하기 위한 의식적인 사고전환이 아니었다. 그저 정말 암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고, 그 모든 걱정이 너무 멀게 느껴져 웃음이 났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을 놓아버릴 것이라 생각했던 건지, 걱정은 부정에게 빠르고 완벽하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부정은 긍정의 탈을 쓰고 있었다. 덕분에 마음이 편안해졌고, 여유까지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정말 암이 아니겠지만, 아주 낮은 확률로 암일 수도 있으니까 대비 차원에서 병원을 알아나 봐두자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의 빅파이브 병원과 명의를 알아뒀다.
그리고 일주일 뒤 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그런데 유선으로는 말씀드릴 수 없으니 일주일 후 내원하세요. 그런데.. 보호자랑 같이 오세요. 꼭이요.”
보호자랑 같이 오라는 말을 듣는 그때까지도 내가 암일리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약간 화가 치밀었다. 조직검사 예약부터 결과 진료까지 거의 3주 반이나 소요되었으니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난 암이 아닐 테니까. 아니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부모님께 같이 진료를 보러 가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건강검진에서 찢어진 모양의 종양을 발견하고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던 날, 전화로 결과를 알려드릴 수 없다며 병원에 내원하라고 연락받은 그날까지도 나는 내가 암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