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이라는 전쟁으로부터의 피난길, 손에 쥐었던 것을 내려놓기까지
암 의심소견을 받은 순간부터 서울의 상급종합병원에 가기까지 소요된 시간은 약 한 달 반. 어느덧 낮과 밤의 일교차가 두드러지는 초가을이 되었다. 새벽같이 나오느라 한여름에 으레 그러했듯 습관적으로 반팔 하나만 입고 집을 나섰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깨달았으나 늦었다. 이미 내 발걸음은 기차 플랫폼을 향하고 있었다. 찬 공기에 차가워져 가는 양팔을 양손으로 연신 비비며 열을 내보았지만 순간뿐이었다. 제법 서늘했던 그날 아침, 기차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누군가는 이른 아침부터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누군가는 고개를 반쯤 기울여 선잠을 자고 있었다. 하얀 노트북 화면과 창백한 뺨 위로 따뜻한 주백색 조명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그 조명 아래에서 검은 백팩을 끌어안고 소리 죽여 울었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혼자였으며, 혼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때의 나는 원 없이 울고 싶었고,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누군가 우는 나를 본다면, 그래서 함께 울어준다면, 나는 도리어 끝없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혼자 간 덕분에 사연 있는 사람처럼-이땐 정말 사연이 있었지만- 혼자 원 없이 울 수 있었다. 콸콸 튼 수도처럼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마스크를 금세 축축하게 적셨다. 물에 잠긴 듯 눅눅해진 마스크를 미리 챙겨뒀던 여분의 마스크로 갈아 끼우기를 반복하는 사이, 열차는 어느덧 ㅁㅁ역에 도착했다.
ㅁㅁ역 ㅇ번 출구 앞에 병원에서 운영하는 순환버스의 탑승장소가 있다고 했다. 초행길이라 잔뜩 긴장했으나 그와 달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정류장에 한 줄로 길게 늘어서있었다. 이윽고 ㅇㅇ병원이라는 전광판을 부착한 전세버스가 도착했지만, 대기인원이 많아 두 대를 보내고 나서야 탑승할 수 있었다. 순환버스에 오르기 위해 대기하던 수많은 사람들과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문득 이 여정이 질병이라는 전쟁으로부터의 피난길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걸 병원에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내가 모르던 세상이었으며, 이제부터 내가 친숙해질 세상이었다.
순환버스의 목적지는 단연 ㅇㅇ병원이었으나, 워낙 큰 병원인지라 내부에도 정류소가 여럿 있어 ‘ㅇㅇ병원, ㅇㅇ병원 장례식장, ㅇㅇ병원 암병원’ 순으로 향했다. 버스가 첫 번째 정류소인 ‘ㅇㅇ병원’에 도착하자, 나이불문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리려고 일어서 복도통로가 인산인해가 되었다. 나는 자리에 고요히 앉아 그들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나도 이곳에서 내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목적지는 ‘ㅇㅇ병원 암병원’이었다. 저마다의 중한 질병을 진료받으러 상급종합병원에 온 것이겠으나, 자기 연민의 정점에 달해있던 그때의 나는 그들을 약간은 부러워했던 것 같다. 누구나 내 손톱 밑 가시가 제일 아픈 법이니까. 차라리 가시였으면 시원하게 뽑기만 하면 되었겠지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암 진행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예약해 둔 여러 검사를 순차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유능한 의료진과 훌륭한 인프라가 맞물려 구축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의료 컨베이어벨트 위에 몸을 맡겼다. 나는 이 날 채혈 검사를 시작으로 유방 초음파, 유방 엑스레이, 흉부 시티, 복부 시티, 유방 MRI, 뼈 검사 등의 많은 검사를 단 하루 만에 받을 수 있었다. 만 40세 미만의 암환자를 대상으로 모든 검사를 하루 만에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패스트트랙’ 제도 덕분이었다. 젊은 암환자가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놀랍게도 더 있다-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은 오진이었다‘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그렇다면 나는 지난 모든 검사와 걱정을 뒤로하고, 완벽히 모른 척 잊고 살 자신이 있었다. ”아, 검사하느라 돈만 날렸네“라는 말로 툭 털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유방초음파 검사 중 세침흡인검사를 받으며 일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세침흡인검사는 침처럼 가느다란 주삿바늘을 병변 부위에 찔러 세포를 흡인하여 검사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겨드랑이 림프절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었다. 최초 유방 초음파 당시에는 겨드랑이의 림프절에 전이 의심 소견이 있어 겨드랑이 쪽도 조직검사를 권유받았으나, 당일에는 정상으로 보여 조직검사를 받지 않았다. 그때의 난 안도했다. 림프절 전이 여부는 암 기수의 중요한 판단 지표였고, 전이는 당연히 없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 세침검사를 받다니. 체감으로는 조직검사보다도 더 아프게 느껴졌다.
검사를 다 마치고 나서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어느덧 늦은 저녁이 되었다. 나는 열차 창가 좌석에 앉아 이전에는 관심도 없던 것들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어두운 지하터널, 이후 언뜻 보이는 높은 건물들이 어느덧 논과 밭이 되고, 또다시 높은 건물들이 그 사이 어둑해진 하늘을 가리는 광경을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걸 내가 다시 볼 수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그날 나는 새벽 일찍 집을 나선 순간부터 돌아오는 밤까지 내내 울었다. 그때의 나는 거의 눈 떠 있는 내내 눈물을 쏟아냈다. 체감으로는 하루에 마시는 물보다 하루에 쏟아내는 눈물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나는 물에 완전히 담가 눅진해진 솜 같은 몰골로 돌아왔다.
새로운 직장에 이직한 지 채 3개월도 안되었던 그 무렵, 직장에 진단서와 함께 질병휴직을 신청했다. 경력 있는 신입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주겠다는 제법 그럴듯한 포부를 갖고 있던 나는, 상사 앞에서 암 진단 사실을 밝히며 끝내 목 놓아 울었다. 소문이 날까, 평판이 안 좋아질까. 3년 후면 승진대상자였는데, 승진마저도 요원해질까 두려웠다. 그러나 휴직하지 않고서는 이겨내기 힘든 치료를 앞두었으니 무언가는 포기해야 했다. 나는 나의 그럴듯해 보였던 평판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입사하자마자 3개월 만에 장기 질병휴직을 하게 된 환자가 되었다. 나는 난생처음 내가 쥐고 있던 것을 강제로 내려놓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수많은 선택 경험을 통해 추론해 보건대, 나는 나의 존재가치를 ‘쓸모’를 통해 부여해 왔다. 그렇게 매 순간 쓸모를 증명하며 살았다. 그게 내겐 미약하게나마 살아가는 동력이 되었고, 때론 목표했던 것을 얻어내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환자가 된다는 건 그 쓸모를 증명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항상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내겐 나조차도 짐이었다. 이 ‘짐’을 누군가에게 의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지만, 울지 않을 수는 없으니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야 그 모든 순간 눈물 흘리던, 내 나약한 모습을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울 누군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