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일도 다 해낼 테니, 이번 생을 잘 부탁해
항암치료 당일, 오전 일찍 병원에 들러 먼저 혈액검사를 받았다. 상급종합병원의 채혈실은 오전 여덟 시에도 수십 명의 대기인원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번호가 호명되어 창구에 가면, 채혈에 앞서 환자 본인의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채혈을 의뢰한 진료과를 확인한다. 이름, 나이에 뒤따르는 ‘혈액종양내과‘라는 진료과 명칭을 옆 사람이 들을까 부끄러워, 당장 자리를 박차고 전속력으로 도망쳐 나오고 싶은 충동을 매번 꾹 참아내었다. 병원에서 다른 환자의 나이와 진료과가 서로에게 무슨 상관이겠냐만, 그때의 나는 암 수술을 받고도 여전히 내가 암 환자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걸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는 사람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다만 항암치료는 받고 싶다고 무조건 받을 수 있는 치료가 아니었다. 혈액검사 이후 진료실에서 혈액 내 주요 수치를 확인한 뒤, 당일의 항암 가능 여부가 결정되었다. 특히 항암 차수가 쌓일수록 호중구 등 주요 수치가 점점 떨어지기 때문에, 환자들은 치료 내내 호중구를 높인다고 알려진 소고기와 바나나, 그리고 닭발곰탕을 먹는다. 그래도 낮으면 호중구 감소증 예방을 위해 뉴라스타 등의 주사를 투여하기도 하지만, 과다하게 낮을 경우에는 결국 항암치료가 연기되기도 한다.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고 싶은 환자 입장에서는 가장 원치 않는 일이다. 호중구는 백혈구(호중구, 림프구, 단핵구 등으로 구성)의 50~70%를 차지한다. 원래도 백혈구 수치가 낮았던 나로서는 8차에 걸친 항암치료 동안 내 백혈구가 힘을 내주길 바랄 뿐이었다.
항암치료실 내 대기실은 가뜩이나 좁은 데다 환자와 보호자가 한데 모여 앉을자리는 물론이고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였다. 번호표를 뽑고 접수까지 완료하고 나면 대략적인 대기시간을 알 수 있었는데, 아침 이른 시간에 방문해도 짧으면 2시간 반, 길면 4시간을 대기해야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항암치료 자체도 1시간이 넘게 소요되어서, 그날은 치료만으로도 하루가 금세 지나가버렸다. 약 3시간의 대기 끝에 들어간 주사치료실은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침대가 아닌 리클라이너 의자를 비치해두고 있었다. 등받이와 발받침의 각도를 조절해 거의 눕다시피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의자가 마치 원으로 둘러앉아 다 같이 마주 보도록 배치된 점이 살짝 신경 쓰였으나, 그마저도 회차가 쌓일수록 익숙해졌다. 나는 의자에 앉아 제법 씩씩한 표정으로 물과 레몬캔디, 이어폰, 수면양말과 같은 항암 필수품을 옆에 꺼내두었다.
곧이어 수술 부위 반대편 팔 정맥에 주사 바늘을 맞았다. 살을 찢는 듯한 통증에 이어, 생리식염수가 정맥을 따라 차갑게 흘러들어왔다. 바늘이 정맥에 잘 위치했는지 확인하고, 혈관을 열어 항암제가 잘 주입되도록 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섬찟하게도, 암세포를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이 세포독성 항암제가 근육에 잘못 투여될 경우 조직이 괴사 될 수 있었다. 항암이 지속될수록 혈관이 굳어서 쇄골 부근 피부 아래에 포트를 삽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나는 8번의 항암치료를 한쪽 팔로 버텨내야 했다. 이미 수술한 쪽 팔에는 채혈, 주사 등이 평생 금지되기 때문이었다. 무뚝뚝하면서도 자상한 혈액종양내과 의사는 내 팔을 보고는 이 정도 정맥이면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암 수술 후로는 작은 시술도 피하고 싶던 나로서는 파랗게 불거진 정맥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곧이어 진한 주황빛을 띠는 항암제가 투여되었다. 총 8차의 항암치료 중 4차에 걸쳐 투여받을 첫 항암제는 아드리아마이신(Adriamycin)과 사이클로포스파마이드(Cyclophosphamide)의 영문 앞글자를 딴 이름, 일명 AC였다. 영문 알파벳 그대로 '에이씨'라고 부른다. 그 약은 이름에 걸맞게 정말 ‘에이씨’였다. AC는 특유의 선명한 주황빛깔과 어지럼증, 메스꺼움과 같은 엄청난 부작용으로 악명이 높은 항암제였다. 그런고로 잔뜩 긴장했으나, 첫 투여 당시에는 걱정과는 달리 약간의 어지럼증과 코가 시큰해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항암 따위, 언제나 그랬듯 이것 또한 잘 이겨낼 것이다!’라고 씩씩하게 다짐했던 차에 증상마저 경미하니, ‘역시 항암제도 나한테는 별 거 아닌가 보다. 다음에는 혼자 와도 되겠다.'라며 제법 의기양양해졌다.
그러나 이 강력한 세포독성 항암제의 부작용에 예외는 없었다. 증상은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가는 차 안에서 시작되었다. 이상하게 몸에 기운이 빠지고 축 처졌다. 머리는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고, 속에서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곧 차량 뒷좌석 옆자리에 고개를 박고,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그 시간을 버텨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몸이 약해져 멀미를 심하게 하나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눈을 감고 2시간을 이동해 대전에 도착한 뒤, 늦은 저녁을 먹으러 IC 근처의 한 국밥집에 들렀다. 입맛이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 살지 않겠나 싶어 차에서 내리는 데, 뭔가 이상했다. 살면서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을 흔히 경험해 보았으나, 항암 직후의 그것은 평생 경험해 본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렬했다.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 빠진 듯한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발 밑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 그 아래로 정신없이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리를 들기 어려워 허리를 45도 굽힌 채로 간신히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서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가, 옆으로 눕기를 반복했다. 밥상 앞에서 엎드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는데.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동시에 목과 가슴사이 한가운데 메스꺼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토를 하고 나면 괜찮아질까 싶어 손가락을 입에 넣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방금 닦아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나무 테이블의 꿉꿉한 습기를 견디며 눈을 감고 있다가, 음식이 나온 후에 숟가락을 간신히 들었다. 꽤나 좋아하던 곳이었는데, 먹는 내내 구역질이 올라왔다. 살고 싶었고, 그러려면 먹어야 했다. 몇 숟갈을 입에 욱여넣고, 쉬고, 또 욱여넣고를 반복했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 있던 뺑뺑이-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려서 타는 놀이기구-를 타고 신나게 돌고 나면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 못해 어지러웠다. 그러나 몇 분 간 앉아서 잠시 쉬고 일어나면 아무 일 없던 듯 멀쩡해졌다. 금세 사라져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그 어지럼증이 하루 중 5분을 넘어 24시간, 열흘 내내 지속되는 것. 그게 바로 항암이었다. 앉아있어서 어지러운가 싶어 의자에 머리를 기대어봐도, 그러다 못해 자리에 드러누워봐도, 때로는 서 있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몇 분을 가만있지를 못하고 돌아눕고 앉고 서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내 머리통을 강하게 붙잡고 흔드는 느낌이었다. 이 육체라는 껍질을 벗어던지지 않는 한 이 어지럼증에서 벗어날 방도는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물을 마실 때도 구정물을 삼키는 것처럼 역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역시 살아야 하니, 물 대신 레모네이드 음료라도 들이키고 밥 반공기를 30분에 걸쳐 간신히 삼켜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라도 먹지 않으면 이 긴 치료를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과정은 마치 잔뜩 흐린 회색빛 하늘 아래 장대비가 쏟아지고, 거센 바람으로 울렁이는 파도를 맞으며 맨 몸으로 바다를 헤엄치는 것과 같았다. 코와 입으로 들이치는 바닷물을 울컥울컥 삼켜내며, 차가운 물속에서 숨 한번 쉬어보겠다고 전력을 다해 발을 구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생존본능으로부터 근원적인 두려움이 엄습했다. 삶에 별 미련이 없던 나는 어느새 삶을 위해 별별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가라앉고 있었다. 약물은 내 몸 구석구석의 빨리 자라는 세포를 파괴하고 있었다. 내 정신도 함께.
이윽고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기 시작했다. 일말의 희망으로 나는 탈모로부터 예외이지 않을까 약간은 기대했었다. 그마저도 듬성듬성 빠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말 그대로 ‘민머리’가 되었다.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맨 두피를 본 건, 머리털 난 후로 처음이었다. 그 생경함이란. 이렇게 되니 머리를 감을 때에도 샴푸가 아닌 폼클렌징을 썼다. 밖에 나갈 땐 민머리에 인조 통가발을 썼다. 사람 머리로 만든 인모가발은 정말 감쪽같고 오래 쓸 수 있었지만, 나는 기왕 가발을 쓰는 김에 못해본 스타일링을 해보겠다며 밝은 갈색, 어두운 갈색, 검은색, 탈색한 샛노란색 가발을 번갈아 쓰곤 했다. 그때의 나는 가발 써서 오히려 좋아! 를 외쳤으나, 솔직히 좋지만은 않았다. 티가 날까 전전긍긍한 시간, 들켰을 때의 민망함, 금방 상하는 약한 재질, 1백만 원을 넘은 총금액을 생각하면 마냥 좋을 수가 없었다.
항암치료를 받고 나면 일주일 동안은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이 최고조에 달하고, 그 후로 며칠에 걸쳐 서서히 괜찮아져 남은 며칠은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된다. 다만 처음엔 열흘이면 정상 상태가 되었는데, 차수가 누적될수록 회복 기간이 하루, 이틀 점점 길어지더니 14일이 되도록 상태가 나아지질 않았다. 진작 사라져야 했을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으로 이리저리 뒤척이며 괴로워하던 어느 날엔 서러움에 눈물을 쏟았다. 그 와중에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나를 움직였던 모든 욕구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이제는 가만있어도 눈물이 흘렀다. 나는 어느덧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서지도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