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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랑 정원예술가 Jan 29. 2017

동백과 바다,  22년 후

소설- Windsor의  아침 -105. Evol

22년 후의 아침, 전화선을 타고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그 해 봄 오월 윈저 성 공원의

노란 수선화 꽃잎 사이로 떨어지는 아침 햇살처럼 투명하게 그녀에게 전해져 왔다

목소리에 색이 있다면 그의 목소리는 아이보리와 노랑을 섞은 부드럽고 포근한 색깔일 게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 낮은음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속한 기억, 물건들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젠 정리를 해야 할 듯해요

 3월이면 더 이상 데리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서 한참 고민하고 있었어요"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그녀에게 놓인 삶이  큰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듯한 느낌에  쌓여 버렸다.

 차를 멈추고 철책이 가로막은 강가를 바라보며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한 채 흐느껴 울었다.

 겨울 강가 습지대엔 철새 떼만 조용히 저녁 먹이를 찾고 있었으나 

마치 다른 이에게 들리는 걸 막기라도 하듯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깨를 떨며 속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되뇌는 말은 단 한마디뿐이었다

 '당신도 지금까지 나와 함께 했었었나요?'

 그리고 소리쳐 묻고 싶었다

 ' 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랬다면, 내 삶은 전혀 다른 곳으로 흘렀을 텐데요.

   그리고 온전히 당신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당신과는 끝이 나질  않아요"라는 울음 섞인 그녀의 말에  

 "내가 어떻게 해 드려야 할까요? "라고 되물으며

  22년 뒤 이제야 그도 그녀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음을 처음으로 말했다.

  


 순간 그녀는 지금까지 그녀 자신에게  선고했던 모든 편견과, 부정과, 상심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그녀만의 장벽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있음을 보았다 

기쁨과 화해의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더 사납게 그녀를

옥죄어  옴을 더 극명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소리쳤다

"아냐, 그럴 수 없어! 허상의 낡은 인연으로 더 이상 나를 잡아둘 순 없을 거야"

 오랜 세월  진실이었고, 

살아서 지켜온  그것만이 내가 마주해야 할 것일 뿐이야"

" 그가 살아있잖아! 그렇게!"

다시 그녀는 무너지듯, 차량 핸들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토해냈다.


서편의 붉은 노을이 검은 강물 위로 길게 불의 칼처럼 쓰러져 누웠다.

저녁 어둠이 강가의 작은 점 같은 그녀의 차를 삼키며

그녀의 긴 시간의 아픔과 설움까지 삼켜버리는 듯했다.

그녀는 그 어둠의 한가운데 점점 사위며 사라지는 듯했다.

그 스물두 해의 세월 동안 그의 사랑이 사위어 사라졌다 믿었던 것처럼

그녀도 곧 사라질 것만 같았다

                                        

돌아와 어두운 방에 불을 켜며  그녀는 그제 데려온 나무에 순하게 핀

동백 한송이를 바라다보았다.

사진 작업을 하려고 세워 놓은 조명과 장비에 하나 둘 불을 켰다

그리고  동백을 이리저리  조명에 비추며

꽃잎 사이사이 숨겨놓은 겹겹으로 그려낸 선들을 찾아 들어갔다


조명 속의 동백은  수많은 별들을  꽃잎에 박아둔 듯

혹은 진주를 박아  수를 놓은 듯 신비한 눈빛을 건네고 있었다

문득, 동백과 진주와 별이,

그와 그녀처럼 억겁의 시간과 공간을 사이에 두고

멀기만 한 그것들이

우르르 이 앞의 한송이 꽃으로 들어와

한 몸이 된 듯 보였다


마치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그와만 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와의 사랑,

동화처럼 영화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게만 지나간 시간들.

이 세상에 그토록 온전히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해야 할 말과 들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아니 어쩌면 그였기에 모든 것이 신비롭게 빛났는지도 모를

그와의 사랑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이 지구에서 사라졌다고 믿게 했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냥 아무 일도 없다고 되뇌며 3년이 지나갔고 다시 7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타이밍 벨트가 끊어져 고속도로에서 죽음을 느낀 바로 그날

그 고장 난 차와 함께 트럭 뒤편에 올라타 서울로 향하며

처음으로 그에게 물었었다.


그 방금 죽음을 지나친 듯한 순간 뒤에, 퍼뜩 그냥 죽으면 

안 될 듯한 꼭 미리 보고 가야 할 것 같은 사람 두 사람이 떠 올랐다

그가  그중 한 사람이었다

고속도로 왼쪽 산으로 서서히 어두워가는 하늘을 보며 공기 위를 떠가는 듯한 

야릇한 느낌의 이상한 만족감을 느끼며 자동차 정비공장을 향할 때였다. 

그는 똑같이 그 자리에 있었다

10년 전의 그 목소리 , 그 애절함 , 그 따듯함

그러나 믿지 않았다

그가 여전히 그녀 곁에 있음을.


그리고 다시 12년의 세월

하지만 그녀 또한 그를 보내지 못하고

결별을 믿지 못한 채  끝나지 않은 그와의 사랑을 붙들고

삶을 지탱해 왔다

 

그렇게 삶의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곁에 없지만 함께 있다고 믿고 싶어 하며 

그와 함께 보내온

22해의 봄, 여름, 가을 , 겨울이었지만  정작 그녀는 그도 그녀와

함께 함을 알지는  못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만은 영속되는 사랑이 있다고 믿지 않았었다. 

영원한 사랑 , 아름다운 사랑 등은 특별한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있는 일이라고 

"애드가 알란 포우의 애너벨 리"나 유행가 가사의 그것처럼...

혹은 자신이 그런 강한 사랑의 결속에 묶여 있을 수 있는 귀한 사람이라 믿지 않기로 했었었다.

설움이 밀려들었다. 

자신을 부정했던 22해의 시간들

 그토록 강한 부정과 편견과 거부와 냉담은

 그녀가 지키고 싶었던 오직 하나 그와 함께만 가능하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멀리 밤하늘의 긴 기다림의 별이

짙푸른 바다의 푸른 바람이

긴 세월의 인고로 영근 진주가

하나하나 날아와

오늘 꽃잎에 새겨진 듯 선명해 보였다



<동백과 바다 >

산에 사는  

동백 아씨

밤이면 밤마다  

남몰래

바다를 품었습니다

산에 사는 동백 아씨,

꿈인 듯

만난 님을

산속에 품고 파서

치맛자락 올올이

진주를 품었더니

바다 님은 별을 안고  

진주 동백이

되어있습니다


사진 촬영 내내

꽃잎의 미세한 줄기 사이로 들어앉은 별에

눈길을 묻으며 그녀는

다시 그해의 그 오월 아침의 Windsor 의 정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2017.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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