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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ong 빌롱 Sep 02. 2024

환자 무용수

종합병원 단골 손님

대학교에 들어 가서 성인으로서 대학 생활을 맘껏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교수님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으셨다. 미팅 있을 때마다 불러 다른 학교 교수님께 나를 제자라며 소개 시켜 주시고 다른 분들이 감격하고 칭찬할 때 마다 어깨가 올라가며 뿌듯해 하셨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교수님을 아주 잘 이해 하게 되었다. 누가 봐도 무용하기에 출중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제자는 곧 스승의 재산이다. 교수님은 유럽이나 미주 등 공연이 있을 때마다 부르셨다. 그래서 누구나 다 흔하게 하는 미팅도 총 3번 밖에 안 해봤던 것 같다. 미팅은 아니지만 신입생으로 들어 와서 선배들이 남자 소개 시켜준다며 나의 전화번호를 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극히 부담스러웠다. 내가 남자친구 없다는 거 친구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선배들한테만큼은 있는 걸로 해달라고 부탁을 할 수 없었다. 다들 선배들한테 찍히지 않기 위해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데, 나 혼자 선배들에게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을 동기들 중에서 질투하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있었다.

선후배 관계가 엄격한 무용과에서 선배의 말은 곧 하늘 정도는 아니더라도 스승이나 다름 없었다. 약속 장소에 셋이 만났다. 선배언니는 나에게 자기가 잘 아는 오빠라며 소개시켜 주고 그 오빠에게는 후배 중에 가장 예쁜 애라며 나를 소개 시켜 주었다. 자기가 잘 아는 오빠를 소개시켜주면 내가 편하게 만나서 사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내가 불편해하니 긴장 풀라며 그 오빠에게는 우리 과가 워낙 선후배 사이가 엄격하고 깎뜻해서 그렇다며, 내가 서먹해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소개 받으며 한 번 만나고 안 만난 케이스도 많았다.


학교 생활동안 한 무대에서 9개 작품을 하루 종일 한 적도 있을 만큼 동기들과 밥 먹고 춤추고 또 춤추고 밥 먹고를 정말 밥 먹듯이 했다.

졸업 작품 연습하고 집에 가려고 복도를 거니는데 국립무용단에 계신 선배 현주언니를 만났다. 학교에 특강차 왔다고 했다. 서로 3년만에 처음이라 놀라며 안부를 물었다. 현주언니는 무용단 들어오라며 "너가 들어 오면 무용단 완전 살지, 이번에 신입 한명이 들어 왔는데 성대에서 제일 예쁜 애라는데 야 네가 훨씬 예쁘다~!"

하지만 무용단 성격과 나는 맞지 않았다. 틀에 갖혀 무용만 하며 사는 것보다 이제 졸업이니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었다.


 전철 좌석에 앉아 있는데 누가 “율아~ !”하며 반갑게 환히 웃으며 다가와 말을 걸어 왔다. 누구인지 전혀 몰라서 “누구세요?” 라고 물으니 “나야 나..주은미..우리 중학교때 같이 무용 했었잖아..!!!”

너무 어리둥절 했다.. 은미라고 생각나긴 하는데 전혀 얼굴이 그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참을 긴가민가 보다가 “정말 은미 맞아? 몰라보겠다..”

“율아 너는 어쩜 중학교때 그대로야 똑같애!! 하나도 안변했어!!”

“너.. 은미 맞지? 못 알아보겠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이 그녀에게 말을 했다.

“나는 서울예술대학교 현대무용으로 들어갔고 유빈이는 한국무용 전공으로 상명대학교 들어 갔어”..

또 영주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며 궁금해 했다. 사실 영주는 중학교 졸업 후 힘든 무용 생활에 지쳐서 일찍이 그만 두고 미술의 길로 들어 갔었다고 말해 주었다.

 나의 학교를 물어서 말해주니 놀라며 "오오~"라고 감탄사를 날렸지만 약간 질투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질투심이 많은 아이가 안 그럴리 없지..  아직도 그 아이의 얼굴이 중학교때 은미인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날 잘 아는 아이이니 은미 맞겠지.. 눈이며 코를 성형수술 한 것 같다.


공연을 앞두고 평상시처럼 연습을 빡세게 하고 다른 무용수들과 헤어진 후 혼자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엉덩이와 허벅지가 심하게 당겼다. 근육통은 흔히 있는 일이라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날도 똑같이 공연 연습에 몰두하고 집에 와서 러닝머신을 뛰는데 아무래도 이제까지 내가 겪어 왔던 단순한 근육통은 아닌 것 같아 그만 멈추고 스트레칭으로 마무리 했다.. 조금 무리한 듯싶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아파 와서 정형외과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아픈 증상이 안 나타나는지 운동을 무리하게 하면 그럴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렇게 공연까지는 큰 방해 없이 지나갔다. 그로부터 세달 후 호주 센트럴 파크 예술극장에서 열릴 공연를 준비하기 위해 각자 파트 연습에 몰두하는데 정신이 없었고 나는 솔로로 하는 파트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감정을 잡고 연습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연습이 끝나갈 무렵 허벅지의 고통이 점점 내 정신에 아프다는 신호를 세게 보내고 있었다. 연습이 끝나고 나는 단장님께 내 증상을 말했더니 재활의학과에 가보라고 권유하셨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나와 같은 증상을 가진 운동선수들이 꽤 있었다. 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찍어보았더니 뼈에 힘줄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무리한 운동 때문에 힘줄이 떠서 그 사이에 염증이 생겼다고 하셨다. 곧바로 신경치료를 일주일에 두 번씩 받았다. 무리하지 않으면 세 달 안에 좋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두 달 후에 있을 공연이 있기에 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점점 갈수록 걷는 것조차도 아프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손이 하체에 자연스럽게 갈 정도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 자세를 돌릴 때에도 아픔을 호소했다. 공연이 얼마 안남아 긴장되어있는 상태에서 빨리 나아지게 온찜질을 자주했다. 뜨거운 찜질을 하는 중에는 그나마 고통이 덜 느껴졌다. 원래는 쉬는 게 맞지만 제일 눈에 띄는 솔리스트 무용수가 연습을 게을리 한다면 그건 불보듯 뻔한..나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무용수 전체의 이미지인 공연단이 무시 받는 거라서 남한테 피해주고는 절대 못 사는 나는, 나하나 희생하자라는 의미로 평소보다 더욱 연습에 몰두했다. 시드니 공항에서 내려 곧바로 숙소로 향했고 정리한 다음, 무대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은 우리나라 세종문화회관을 연상시키는 빨간 카페트로 덮힌 계단이 3층까지 있었다. 무대는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웠다. 이틀 뒤 우리는 무대에 올랐고 눈꼽 만치도 떨리지 않고 자신 있게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연습할 때처럼 감정에 집중하며 무대를 마음껏 즐겼다. 공연이 끝난 후 호주 사람들은 한국 무용수와 사진 찍고 싶어서 긴 줄을 서서 기다렸고 우리는 연신 팡팡 터지는 카메라 앞에서 친절히, 차례가 된 관객들을 맞이하며 활짝 웃어 주었다. 분장실에서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고 숙소로 돌아왔는 데 긴장감이 없어진 탓인지 다시 극심한 통증이 몰려 왔다. 극장 회장님의 저녁만찬에 초대받아 미리 준비해온 깔끔한 원피스를 입고 호텔레스토랑에 가서 만찬을 즐겼다. 그 후 2일동안 관광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치료와 휴식에 집중했다. 갈수록 심해지는 통증에 거의 몸도 마음도 환자가 되었고 이러다가 영영 안 나을 까봐 걱정이 되었다.


통증의학과에 7개월 다녔는데 의심 되는 여러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가 말했다. "원장님이 율님 매일 엄청 걱정 하세요. 왜 안 낫지..하면서요. 7개월이나 다녔는데 당연히 걱정 고민이 될 수밖에 없지. 의사가 아무래도 큰 병원가서 MRI를 찍어 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소견서를 써주며 삼성서울병원을 추천 해주었다. 100만원 비용으로 MRI를 찍었다. 정형외과 전문의가 자기의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산부인과를 한 번 가보라고 권했다. 다음 날 산부인과를 가서 자료를 보여 주었다. 의사가 말하기를 아무 이상이 없다고 정형외과 선생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여기까지 오라고 했을까..라고 했다.

여태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통증의학과, 산부인과 까지 추천해주는 크고 작은 병원을 다 다녀 보았는데 의사들이 하나같이 아무런 증상을 못 찾는다니 너무나도 믿기 힘들었다. 나는 이렇게도 고통스럽게 아픈 데 말이다.  마지막 안 가본 단 하나의 병원>> 인터넷으로 수차례 검색한 결과 나와 같은 증상을 지닌 환자를 치료했다는 한의원을 찾았는데 머나먼 대전이었다. 소견서를 써 준 통증의학과 의사와 상담했는데 대전에 있더라도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 곳이 본점이었는데 서울에도 지점이 있어서 연결된 곳이기에 온라인으로 상담한 후 찾아가서 선생님과 충분한 상담을 나누었다. 선생님은 계속 치료 받으면 반드시 좋아진다고 꼭 나을 거라고 했다.

나는 원장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여기까지 합해서 총 5곳의 병원을 다녔는데 이곳이 마지막 병원이고 싶다고 희망을 다짐하며 치료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사타구니를 포함한 하지쪽 뼈에 장침을 맞고 도수치료를 받았다.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신도 참 못됐지. 어떻게 이런 곳이 아플 수가 있지. 제가 의사된지 30년 되었는데 이곳이 아프다고 찾아 온 환자는 난생 처음 봐요."하고 혀를 차셨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하늘이 엄청 미울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었다. 민감하고 여린 부위에 장침을 맞는다는 건, 그것도 많이, 받아 보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다. 한 침 한 침 맞을 때마다 병원이 떠나갈 정도로 비명을 질러 대, 내 자리는 항상 제일 끝이 고정이었다. 원장님이 남자분이셔서 항상 부원장인 여선생님도 같이 들어 오시는 데 사람이라면 그 민감한 부위 치료 장면을 두 눈을 뜨고는 절대 쳐다 보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배를 칼로 긋는 걸 보듯 그 분은 잔인하다며 얼굴을 찡그리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는 하셨다. 항상 나한테 그걸 어떻게 참냐고 자기라면 절대 못 참을 거라고 대단하시다고 위로와 격려를 보내셨다.

일주일에 2번씩 1년 반 동안 치료 받았는데 처음 보다는 좀 나은 아주 미세한 수준의 속도로 나아 갔다.

어쩌다 그런 희귀질환이 걸렸는지 참으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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