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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Sep 14. 2021

신고식

몸살



이만하면 잘 참았다.



여느 날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났다. 그래도 다름없이 책상에 앉아서 오늘의 일과를 적기 시작했다. 얼마 전 서점에서 들춰본 책들의 목차와 저자를 확인하려고 노트북을 열었다. 집과 관련된 책들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집’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시/에세이 분야 책이 7000 권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젯밤부터 저릿저릿한 오른쪽 팔을 왼손으로 꾹꾹 누르며 몸에 변화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삼 사일 전부터 목이 칼칼했다. 환절기가 되면 계절의 변화를 목이 가장 빨리 알아차린다. 기도의 갑옷 역할을 제법 하던 갑상선이 사라진 후로 찬 바람이 바로 목을 뚫고 숨구멍에 닿는다. 잘 때 열어둔 창문이 화근이었다. 차만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버티는 중이었다.



아침 일과를 모두 마친 후, 다락에 놓은 빈백에 걸터앉는데 모든 중력이 나에게 집중된 듯이 땅 속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다리가 말을 안 들어서 하릴없이 머리 위 천창으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도 한 점 없는 아름다운 날이다. 1층에서 회의 중인 남편의 목소리가 아득해지며 잠이 들었다.



눈을 떴는데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이다. 무기력한 몸뚱이가 천근만근이다. 관절 마디마디가 나 여깄소, 하며 통증으로 제 위치를 알린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뱃속이 뜨겁고 울렁거린다. 열이 오르나 보다. 인간의 무의식은 강하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이다. 누울 자리 보고 다리를 편다고, 내 무의식은 나의 부재를 남편이 채워주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온 몸을 선동했다. 바로 오늘이 파업을 선언할 날이라고!  



내가 푹 쉴 수 있게 남편과 아이는 마당으로 모래놀이를 하러 나갔다. 평상에 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는데 열에 들떠서인가, 두 사람 모습이 꿈속의 장면 같다. 그러고 보니 저 모래 박스를 만들고 나서도 몸살을 앓았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한 번 씩 치르는 신고식인가 보다. 글쓰기도 그렇다. 원래 하던 새벽 기상에 ‘매일 글을 발행하자’는 것만 얹었는데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거와는 달랐다. 몸이 마음만큼 정력적이지 못하다. 마음은 슈퍼카인데 몸이 똥차라서 속이 상하다.



남자 둘이 투닥거리며 모래로 지하터널을 만드는 걸 보니, 그때의 아픔이 훈장 같다. 어린이날에 맞춰 완성해 주려고 비 옷을 입고 종일 모래를 나르고, 지붕을 씌웠었다. 아이가 좋아서 소리 지르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우리가 해냈다는 게 정말 뿌듯했다. 다음 날부터 나는 꼬박 앓았다. 그러나 한 번씩 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저 모래 박스처럼 멋진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오늘의 몸살 또한 지나가리라. 그리고 나도 찬 바람이 부는 날, 기쁨의 소리를 내질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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