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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Aug 17. 2021

명절, 너의 의미

명절이란 무엇인가?

명절 증후군. 명절 스트레스. 한국에서 명절이라는 글자 뒤에는 늘 부정적인 단어들이 붙는다. 명절에 있을 육체적, 정신적 대참사를 막기 위한 가짜 깁스도 온라인에서 판매할 정도이니 명절이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 만하다.


학생 때는 도망갈 핑계도 용기도 없어 꾸역꾸역 명절을 견뎠지만 회사에 들어간 후부터는 출근하거나 이를 핑계로 자취방에서 쉬었다. 명절을 보내러 떠난 사람들 뒤에 남겨진 고요한 도시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기분은 씁쓸하면서도 편안했다.


남들보다 특별히 더 고생하는 위치도 아닌데도 그렇게 싫으냐 는 질문을 받았다. 그렇다. 시댁에서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하는 며느리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덜 막힐까 싶어 일찍부터 집을 나서야 되는 귀성객도 아니었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나 버스 티켓을 구하기 위해 웹사이트에서 새로고침을 계속 눌러본 적도 없거니와 서울에서 차례를 지내는 터라 10시간씩 걸려 시골에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고 전형적인 K-집안에서 벌어지는 명절일 뿐이었다.


우리 집은 명절이면 여자들이 전날부터 차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 외에 남자들의 삼시 세끼를 책임졌으며 식사 후에는 커피와 과일 등 후식을 대령했고 추가로 술상을 봐와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졌지만 어릴 때만 해도 남녀는 식사도 따로 했는데, 어른들(여기서 어른은 늘 남성이었다.)이 먹는 음식은 예쁘고 정갈한 그릇에 담겨서 나왔고, 며느리이자 우리의 엄마들은 부엌에서 반찬통이나 양푼 그릇 채로 반상에 올려진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 치워야 했다. 같은 시각, 거실에서는 손하나 까딱 안 하고 물 하면 물이 나오고 술 하면 술이 나오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펼쳐지고 있었다.

취직은 언제쯤 하는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 근황과 향후 목표를 취조당하는 자리는 즐거울 리 없었다.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그 사이에 깊고 따뜻한 속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코로나 시대 이전부터 명절 때만 되면 셀프 자가격리를 하던 내가, 각종 세시 풍속을 챙기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영국에 와서부터 각종 명절을 다이어리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저 지겹기만 했던 설날, 있는지는 알지만 언제인지 관심조차 없었던 동지와 정월대보름도 달력에 그 이름을 올렸다.

지난 설날에는 난생처음 떡국을 끓였고, 명절마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수북하게 쌓이지만 절대 입에 대지 않았던 잡채도 직접 만들어서 야무지게 먹었다. 동지에는 팥가루와 찹쌀가루를 사다가 팥죽을 쑤고 새알심도 올렸다. 정월대보름에는 열악한 영국의 나물 환경을 고려해서 숙주와 시금치만 구색 맞추기로 무치고 부럼을 까먹었다. 어디 더 챙길 명절이 없나 달력에 쓰여있는 뜻 모를 글자들을 인터넷에 검색했다. 혹시 입춘에 봄이 오는 기쁨에 뭔가를 먹지는 않는지, 단옷날 창포물에 머리만 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들은 안 하는지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기웃거렸다.


심심하고 특별할 일 없는 일상에 조금이나마 즐거운 부분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런 날을 핑계로 친구들과 줌 미팅을 잡아서 이야기도 나누고 만든 음식을 서로 자랑했다. 남자친구와 식사를 하며 동지의 유래나 팥죽을 먹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정월대보름은 왜 정월대보름인지 어떤 풍습들을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하면 할수록 우리 조상들은 꽤 귀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상님들이 동짓날 찾아올까 두려워했던 귀신은 어떤 모습의 귀신이었을까? 붉은팥을 무서워하는 귀신이 험상궂은 얼굴로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일 배포가 있었을 것 같지 않았다. 정월대보름에 하는 풍속들도 오밀조밀 미쁘기만 하다. 남들의 말을 더 잘 들어보겠다고 이명주를 한잔씩 들이키고, 각종 나물과 잡곡밥을 먹는다. 아마 복날 이후 처음으로 몸보신을 하는 날인데, 계속 닭을 잡아먹을 순 없으니 나물과 잡곡밥으로 건강을 챙긴 것이 아닌가 싶다.


명절을 느슨하게 기념하면서 오히려 명절의 진짜 필요성에 공감할 수 있었다. 돈 벌고 집안일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육아도 하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갑자기 가족끼리 특별해지기란 쉽지 않다. 명절 만이라도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덕담과 담소를 나누자는 의미에서 명절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옛날에는 명절 때만이라도 푸짐하고 배불리 먹자는 의미에서 닭도 잡고 돼지도 잡고 전, 떡 등 고칼로리 음식들을 만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넉넉해지는 날. 조상님도 들러 함께 배불리 행복하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명절 증후군, 명절 스트레스 등으로 잊힌 명절의 본질은 먹고살기 바빠 잊었던 서로를 기억하고 연결하자는 의미였다.


명절을 핑계로 친구들과 요리를 하고 Zoom을 켜서 같이 밥을 먹었던 것은 코로나 시대에 조금이나마 서로 연결되고 싶은 우리의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심은 오랫동안 내려온 명절의 진가이기도 했다. 의무만 남은 전통이나 가부장 문화는 싫지만 옛 것이 가진 가치는 공유하고 이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김영민 교수는 경향신문 칼럼(링크)에 의미가 퇴색되어 불편함을 가져다주는 명절의 질문 사례들 앞에, “추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하라고 했다. 명절에 마주해야 하는 불편한 순간들 퇴치법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이기도 하다.

명절이란 무엇인가? 늘 해왔던 대로 과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노동을 하고,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는 질문들을 하는 것이 명절인가?

우리의 진짜 명절을 함께 만들어갈 시기가 오길 바란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서로를 격려하는 날이 진짜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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