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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Sep 14. 2021

오늘 여기 당근이 괜찮아

영국 로컬 채소 시장 입문기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만 특별히 도깨비 시장이 있는 줄 알았다. 부모님과 전국 방방곡곡 여행지는 다녀 봤지만, 거기서 재래시장에 갈 일은 없었기에 도깨비 시장이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 있는 시장인 줄 몰랐다. 그곳은 늘 교통이 애매하게 불편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마을버스를 탈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지만 걸어서 30분은 걸리는 우리 마을 도깨비 시장에서는 다양한 식재료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도깨비시장 갈 건데 같이 갈래?”라고 엄마가 물을 때면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었다. 마트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을 고르는 일이 더 편하고 세척해서 예쁘게 포장해 놓아 바로 조리하면 되는 제품들이 끌릴 때도 있지만 도깨비 시장은 특유의 활기와 사람 사이의 연결 지점이 있었다. 어느 가게에서 씹을수록 단 맛이 나는 시금치를 값싸게 살 수 있는지, 어디 과일이 싸고 괜찮은지 등 다년간 도깨비 시장을 다니며, 동네 엄마들과 정보를 교류하며 경험치를 축척한 엄마를 따라, 시장을 누비는 일은 꼭 탐험 같았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마트에 가면 얻을 수 있었던 50% 할인 아이스크림도 없는 도깨비 시장은 달달한 보상 말고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은 화려하지 않기에 그곳에 살지 않으면 쉽사리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Mark & Spenser, Waitrose, Morrison, Tesco 등 뉴캐슬에 위치한 큰 마트만 다니던 영국 생활 두 달 차 무렵 중국 친구에게 Grainger market이라는 동네 시장을 소개받았다. 시내 중심가 건물에 값싸고 질 좋은 채소를 살 수 있는 채소 시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서 직접 채소를 눈으로 보고 담는 일상. 뉴캐슬에 내 도깨비 시장이 생겼다.


Grainger market은 야외에 위치한 도깨비 시장과 다르게 건물 내에 위치해 있다. 채소, 과일 가게, 정육점, 생선 가게, 다양한 식료품 가게 외에도 카페, Take-out 전용 피자, 만두 가게 등이 코너별로 입점해 있었다. 그중 채소 가게를 자주 이용했다. 매번 갈 때마다 야채의 종류와 상태가 달랐다. 장을 보러 가기 전 필요한 물품을 적어서 가지만 막상 가서 야채들을 보면 선택이 달라지기도 했다.


“오늘의 당근이 좀 괜찮은데 당근 사갈까?”


마트에서 파는 깔끔하게 세척된 채소에서는 고유의 시간을 느낄 수 없었다. 품질의 차이야 조금씩 있겠지만 비닐봉지 속에 포장된 그것들은 예상 가능한 퀄리티와 유통기한을 갖고 있었다. 일정한 품질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특별히 더 좋은 채소를 찾기는 어려웠다. 시장에서 여러 가게를 둘러보며 오늘의 당근, 오늘의 가지 등 그날의 가장 좋은 채소를 골라 담았다. 어느새 이렇게 사온 야채로 준비한 한 끼 식사가 더 소중하고 맛있어졌다.



그곳에는 사람 사이의 대화도 있다. 한국에서 파는 사과들, 아오리, 부사, 홍옥은 알지만 Pink Lady가 어떤 사과인지 알 턱이 없었다. 품종이야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요즘 이 시기에 가장 맛있는 사과가 무엇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서로 인사하고 곧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용기 내어 채소를 정리하고 있던 아주머니께 여쭤보았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옆에서 배추를 나르던 아저씨와 토론을 벌이시다 두 분 다 동시에 같은 사과를 고르셨다. 심지어는 가장 비싼 사과도 아닌데 선택받은 사과 덕분에 채소 시장에 대한 신뢰도가 더 올라가고 말았다.



어떤 곳에 산다는 것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것들과 연결 고리가 생기는 데에서 시작한다. 마트에서도 캐셔 분들과 “Hello my dear. How are you doing?” “Have a lovely day.” 등의 대화를 주고받기는 하지만 로컬 시장은 더 특별한 연결을 만들어 낸다. 구글 지도 리뷰에 의존하지 않고, 나만의 시장, 나만의 가게를 만들어 가고 있다. 매일 다른 종류의 채소들을 보며 느끼는 신선함이 다르듯 조금씩 다른 일상이 이곳에 발 붙이고 마음도 붙이고 살 수 있게 한다. 내일의 채소는 누구일지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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