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이지만 베이스캠프를 갖고 싶다
고향 찾아, 영국으로
어린아이가 “난 결혼 안 해!”라고 말할 때면 “평생 엄마 아빠랑 함께 살 거야.”라는 말이 뒤따라 나오며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나 역시 어렸을 적부터 결혼도 출산도 안 하겠다고 외치고 다녔지만 이유는 달랐다. 나를 희생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늘 하고 싶은 일 많고 되고 싶은 것 많은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욕망을 물 없이 덩어리째 삼켜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사회에서 말하는 결혼 적령기가 되고 나서 결혼을 주제로 엄마와 숱하게 싸웠다. 성격대로 살다가는 결혼해서 불행하다, 시댁 식구들과 잘 지내야 하니까 싫은 것도 참고해야 한다, 남편 꼬투리 잡고 잔소리하지 말고 성질 죽이고 살아야 한다 등등 생각도 없던 결혼 시 주의 사항을 들었다. 이쯤 되면 결혼을 그냥 하지 말라는 뜻인가 싶다가도 그 뒤에 꼭 결혼은 꼭 해야 한다, 아기는 있어야지 나중에 후회 안 하고 덜 외롭다 등등을 덧붙이니 대화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 듯 행복한 선택인 결혼과 출산이 마치 나에게는 “자 이제 저는 몸과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고 일평생 희생하며 살아가겠습니다.”를 다짐하는 신체포기각서 체결로 다가왔다. 결혼과 출산에 딱 맞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설령 내가 그렇다 해도 하고 싶을까 말까 한데, 엄마 말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내가 결혼과 출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그냥 피하고 싶었다. 늙어서 외롭고 쓸쓸할 까 봐 두려워서 싫은 일들을 참고 견디며 젊은 날을 버텨내야 한다면 그 삶이 진짜 행복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결혼, 출산 전부 싫고 절대 안 하겠다고 선언하며 살았다. 이제 슬슬 결혼 생각해야지, 결혼도 하고 애도 있어야 행복하다는 조언에 적당히 맞장구 쳐주거나 조용히 넘어가도 되는 걸 알면서도, 굳이 내 의견을 내세웠다. 더 이상 불편한 말들을 꺼내지 말아 달라는 시위 이자, 가족을 상상하면 그려지는 불행한 미래를 스스로 되새기는 주문 이기도 했다. 가족이니까,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라며 상처를 주고받고, 하기 싫은 일들을 강요하는 모습을 봐왔다. 그 삶을 답습하기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영국에서 당시 남자친구,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우리는 평등한 관계를 이야기했다. 내가 하기 싫거나 기분 나쁜 행동은 상대방도 싫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려고 노력했다. 마음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서로 나누면서 생채기를 곪아 터질 상처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네가 어떻게 변하든 영원히 널 사랑할게 라는 말 대신, 지금의 마음 가짐을 지키고자 함께 애쓰며 살아가자고 서로 약속했다. 가족이나 연인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상처 주지 않는 사이, 서로를 존중해주고 각자의 꿈과 행복을 지지해주는 동반자. 나에게 필요하던 사람이었다. 희생, 인내 등 비혼을 외치며 내세웠던 근거들이 사라진 순간, 나도 베이스캠프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생겼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내 감정이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거라 내몰렸기에 불쾌함을 견디고 지금을 버티는 데에 모든 힘을 쏟고 있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늘 튕겨져 나가기 일쑤였기에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불편한 마음을 삭이다 못 참고 폭발하곤 했다. 그 울부짖는 모습을 근거 삼아 나는 성격 파탄자라고 스스로 몰아세웠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나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평온하고 화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하고 온전히 행복했다.
누군가와 함께 절대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믿었다. 욕심 냈다가 못 얻으면 초라할 까 봐 누구와도 살고 싶지 않은 척했다. 포도밭 여우처럼, 진짜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다고 나를 속이며 살았다. 나는 누군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주고 내 감정, 내 꿈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줄 때, 더 나답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힘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베이스캠프를 갈망하고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