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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Oct 30. 2022

열심히 사는 것도 병이었다

고향 찾아, 영국으로

열린 마음으로 남을 대해보려고 무던히 애쓰면서 나 자신에게는 꼰대가 되어 “라떼는 말이야”를 자주 시전 한다. 라떼는 말이야. 잠을 5시간만 자도 다 공부하고 일했고, 새벽까지 근무하고 주말에 출근해도 주말 데이트는 아침부터 꽉꽉 채워서 돌아다녀야 했고, 퇴근하고 나서 온라인으로 필요한 수업을 들어도 끄떡없었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다 되던데, 요즘 너는 왜 이 꼴이냐며 면박을 주곤 한다.


건강하고 튼튼한 몸을 굴리며 열심히 살았다. 사람은 다들 5~6시간만 자면서 사는 줄 알았다. 새벽 2시에 자고 아침 6~7시에 일어나 학교에도 가고 출근도 했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고, 졸리면 커피를 마시며 버티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빽빽하고 숨차게 살아야만 겨우 하나 성공할까 말까라고 생각하며 몸을 앞으로 더 세게 밀었다.


견고하던 몸은 회사에 들어가서 조금씩 금이 갔다. 한 달에 한 번씩 출장을 나가고 새벽까지 근무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날은 출근길에 기절했다. 침대에서 불 켜러 걸어가던 짧은 순간 갑자기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간이 행거가 쓰러져 옷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이따금씩 감기를 심하게 앓아 침대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 흘리며 일주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쓸만한 몸이었다. 잦은 출장, 밤샘근무를 버티며 주말마다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닐 정도의 체력을 비축하고 있었다. 조금씩 삐걱거리고 있지만 여전히 건강했다.



하지만 영국에 와서 내가 오만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평생 함께 해야 하는 지긋지긋한 원수 같은 반려 질병인 방광염을 얻고 난 후였다. 어느 날부터 생식기 안쪽으로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누기가 힘들었다. 찢긴 상처를 누가 벌리고 소금물을 붓는 느낌이었다.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은데, 화장실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잔뇨감에 다시 화장실을 찾게 되었다. 오줌을 그만 싸고 싶어서 물을 안 마시고 참아 보기도 했지만 방광염에 최악인 선택이었다. 결국 물을 몇 컵씩 마시고 10분에 한 번씩 변기에 앉아가며 염증을 빼냈다.

영국의 의료 시스템은 무료지만 한번 진료 예약을 하려면 몇 주가 걸리기 때문에 방광염을 적기에 치료받기도 어려웠다. 임시방편으로 한국에서 챙겨 온 감기약 봉지를 까서 항생제를 꺼내 진통이 오면 한 알씩 먹으며 버텼다.


거의 2주에 한 번씩 몰려오는 증상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내 몸을 아기 다루듯이 걱정하고 달랬다. 잠깐만 방심하면 어김없이 방광염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예전처럼 공부하고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불안했다. 방광염이 도지면 무조건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잠을 청해야 하며, 스트레스를 풀려고 애써야 했다. 이렇게 살다가 아무것도 못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여태까지 알고 있던 필승법이 안 통하는 쓸모없는 몸 같았다.


하지만 몸에 집중할수록 방광염 때문에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방광염 덕분에 내 마음속에 기생하던 바이러스를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러스는 무리해서 살아야만 잘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는 병을 일으키는 주범이었다. 하루를 계획대로 보내지 못하고 흐트러지게 보내면 바이러스가 활동을 시작한다. 이 바이러스는 꽤 폭력적인데, 왜 이렇게 게으르니, 왜 이렇게 나태 하니 하며 나를 채찍질하고 하나둘씩 꼬투리를 잡으며 쥐어뜯는다. 상처에서 피가 날 때 즈음 진정하고 이 정도 했으니 이제는 제대로 살겠지 하며 학대를 멈춘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고 견뎌서 결국 일을 해내는 버닝 코드로 살아왔다. 건강한 몸이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의지의 문제로 가볍게 넘겼다. 의지와 노력 부족이 아니라, 여러 기둥이 삶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몸이 건강했고, 다른 걱정거리가 없었으며, 살짝 피곤하거나 아프면 도움을 받을 보조제, 의료 시스템을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결국 몸과 마음의 체력을 깎고 깎아 가며 살다가 바닥나서 몸이 부서져 버렸으니,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꿔야 했다.


바이러스는 금이 가기 시작한 몸에서 활동하며 몸을 더 조각낸다. 그렇게 하면 예전의 열정과 의지로 돌아올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항생제를 주입하며 바이러스를 몰아내려 애쓴다. 방광염처럼 완치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 몸을 이끌고 살아가려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밤 좀 샐 수 있지, 조금 더 운동할 수 있지, 이 정도 피곤쯤 이야 하며 나를 닦달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던 예전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내 일상을 영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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