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박힌 말들
국경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여러 언어를 배우려고 시도했다. 오랫동안 애증을 품었던 영어, 무협 영화에 빠져 중원(중국 무협 세계 속 주요 무대인 황허강 중류 및 하류 지역)을 향한 로망을 품고 전공한 중국어, 이어서 동아시아 언어를 모두 섭렵하겠다며 기웃거린 일본어, 병가를 내고 스페인에 갔다 와서 스페인 병에 걸려 공부한 스페인어까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과 다른 나라에 대한 호기심으로 여러 외국어 책을 사서 펼쳤다가 덮었다.
언어 기초 회화 책 1단원에서는 알파벳을 익히고 인사말을 배우고, 다음 단원에서 숫자를 알려준다. 여행 가서 물건을 사든, 음식을 주문하든 숫자를 알아야 사과를 몇 알 살지, 음식을 몇 인분 시킬지, 계산할 때 얼마를 낼지 말할 수 있지 않겠냐며 일부터 백, 천, 만까지 가르쳐준다. 다른 언어는 공부해서 숫자 열까지는 셀 수 있었는데, 튀르키예어 숫자는 계속 까먹었다. 비르 Bir, 이끼 iki, 하나 둘까지는 기억나는데 꼭 셋부터 기억이 안 났다. 누군가 사진 찍어 달라고 하면 하나 둘 셋 하면 사진 찍습니다! 하고 사진을 찍어줄 수 없다.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야! 하고 달리기 내기도 못한다. 왜 하나, 둘만 기억나고 셋부터 안 외워지는지 짐작해 보면 평소 들을 일이 많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식당이나 카페에 가서 남편이 주문할 때 서로 다른 메뉴를 시키면 비르 (음식 이름), 비르 (음식 이름)이라고 말하고, 같은 메뉴를 시키면 이끼 (음식 이름)이라고 하니 셋이라는 숫자를 들을 기회가 드물었다.
하나 둘만 알아서 무슨 쓸모가 있으랴 싶던 나의 짧은 튀르키예어 숫자 지식이 엉뚱한 곳에서 효용성을 발휘한 적이 있다.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일주일 동안 한국에 다녀왔었다. 가장 싼 티켓을 찾아보니 몽골 항공을 타고 울란바토르를 경유하는 티켓으로 한 사람당 백만 원이었다. 이번 기회에 한국에 가본 적 없는 짝꿍도 함께 가려고 하니, 직항 티켓을 사면 둘이 합쳐서 거의 백만 원을 더 내야 했다. 물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평균 여덟 시간 기다려야 하고, 수하물도 직접 다시 체크인해서 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 아직 젊으니까(비록 숫자는 둘까지 밖에 기억 못 하지만) 약간 고생해도 괜찮다며 몽골 항공 티켓을 끊었다.
새벽 네 시에 울란바토르 공항에 도착했다. 수하물을 찾으러 나가려고 입국 심사줄을 섰다. 남편이 먼저 심사를 마치고 게이트 밖으로 나가고, 내 차례가 되어 여권을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왜 왔냐고 물어보면 환승하러 왔고, 짐을 직접 찾아서 다시 부쳐야 해서 입국한다고 대답해야지.’하고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다. 직원이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인상을 찡그리고 옆자리 직원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게 “파사포트 passport?”라고 물었다. 뭘 말하고 싶은지 몰랐지만 최대한 무해한 사람이라는 표정으로 “응, 내 여권인데 왜?”라고 답하자 다시 옆 사람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불안해졌다. 멀찍이 서있던 다른 직원을 손짓하여 부르더니 그 직원이 내 여권을 받아 들고는 나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심사를 마친 다른 사람이 나가면서 불투명한 유리로 된 게이트가 열렸고, 남편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눈을 크게 뜨고 눈썹을 내리고는 직원을 따라갔다.
직원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까지 들어가서 나에게 앉으라고 하고 내 여권을 들고 사라졌다. 무슨 일인지 알려주면 수사(?)에 적극 협조할 의향이 있는데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주변에는 붙잡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한참 기다리다가 직원 서너 명이 다가와서 나에게 따라오라며 복도 안쪽 사무실로 들어갔다.
지금 말할 기회를 놓치면 또 얼마나 오래 나를 세워두고 자기들끼리만 탐정 수사를 할까 싶어 걸어가면서 혹시 무슨 일인지 알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직원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면서 말했다.
"이끼 파사포트"
이끼? 내가 아는 그 이끼 iki? 내 여권이 두 개라는 뜻인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5년 전 몽골에 놀러 왔을 때 썼던 여권이 만료되어 새 여권을 발급받아서 사용하고 있어서, 여권 번호가 두 개가 떴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몇 년 전에 내가 몽골에 방문했을 때 다른 여권을 써서 그런 것 같아. 그 여권은 만료되었고, 지금 나에겐 그 여권이 ONE AND ONLY 여권이야."
one and only는 보통 유일하고 특별할 때 붙이는 수식어이다. 여권이 특별할 게 있겠느냐마는 최대한 직관적으로 내 여권이 하나뿐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내 설명을 듣고도 고개를 저으며 직원들은 몇 번이고 내 여권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확인했고, 유난히 많이 찍힌 이스탄불 출입국 도장에 대해 한참 토론하는 듯했다. 절차상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에 뭘 뒤져도 아무것도 안 나올 것이 분명한 바. 여전히 꺼림칙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추궁할 방법이 없으니 결국 입국을 허가해 주었고, 나는 한 시간 넘게 붙잡혀 있다가 겨우 풀려 났다.
오래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연인처럼 남편을 보자마자 끌어 앉았다. 사정을 모르는 남편도 게이트 밖에서 초조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심사대 앞에 서있는 걸 보고 있다가 컨베이너 벨트를 도는 캐리어 가방을 발견하고 가지고 왔을 뿐인데, 아내가 안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기다려도 나오지 않길래 직원들에게 상황을 물었지만, 다들 코딩이 덜 되어 출력값이 하나밖에 없는 AI처럼 "영어 할 줄 아세요?"라는 질문에도 "네, 저는 영어 할 줄 압니다."라고 답하고, 제 부인이 사라졌는데 어디 갔는지 알아 봐 줄 수 있냐는 질문에도 "네, 저는 영어 할 줄 압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구글 번역까지 써서 물어보다가 안되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그제서야 직원들이 나를 찾으러 간 모양이었다. 남편에게 말했다.
“나 이끼 덕분에 풀려난 걸지도 몰라."
이끼 iki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면 제대로 설명할 기회도 없이 의심만 받으며 붙잡혀 있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제풀에 지쳐 나를 보내줄 때까지 더 오래 버텨야 했을 것이다. 몽골어와 튀르키예어 사이에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들이 종종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아는 단어가 나와서 다행이다. 언제 (üç, 우취)을 외울지 모르지만 적어도 둘(iki, 이끼)만큼은 절대 안 까먹을 자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