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반 바이람라르(Kurban bayramlar)
남의 집 애기는 빨리 크는 것 같고, 다른 나라 명절은 빨리 돌아오는 것 같다. 설날이 지나고 추석이 오기까지는 한참 걸렸던 것 같은데, 튀르키예에 오니 지난 명절에 가족들과 모여서 저녁을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명절이라고 한다. “벌써?”를 내뱉는다. 명절이 자주 있는 것 같다고 하니, 길게 쉬는 명절은 일 년에 두 번뿐인데 뭐가 많으냐고 한다.
튀르키예에서 길게 쉬는 명절은 모두 이슬람교와 관련이 있으며, 바이람 Bayram이라고 부른다. 튀르키예는 세속주의 국가이지만 국민 대다수가 무슬림이라서 바이람을 공식 휴일로 지정하고 쉰다. 확인해 보니 올해 두 바이람 사이 기간이 두 달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기분 탓이 아니라, 금방 또 명절이라는 말이 맞았다. 다음 바이람은 한참 후에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났냐는 의미의 “벌써”를 말하며 맞이할 것만 같다.
이번 명절은 쿠르반 바이람 kurban bayram, 희생 명절로 불린다. 옛날부터 부유한 집에서 양 한 마리를 잡아서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날이었다. 양을 골라 죽이고 고기를 기부하는 행위가 지금까지 풍습처럼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 명절 이름을 착각해서 잘못 불러왔다. 사람들이 “쿠르반 바이람”을 빠르게 말하니 “쿠루 바이람” 으로 발음이 연결되어 들렸고, 양을 희생해서 바치는 날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부터 쿠루 대신 쿠주(Kuzu, 양)로 들리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튀르키예어를 하는 게 기특했던 건지, “쿠주 바이람”이라고 말해도 다들 알아듣고 (또는 흘려듣고) 고쳐주지 않아서 일 년 남짓 계속 양 명절이라고 불렀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여성의 날, 고양이의 날 모두 그 대상을 위한 날이 아니었던가? 양들의 날이라고 부르면서 왜 양들을 죽이는 건가 싶어서 명절의 이름부터 불합리하다고 남편에게 이의를 제기하다가 내 착각이라는 걸 알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고속도로에서 양들을 가득 싣고 도시로 향하는 트럭을 자주 볼 수 있다. 양들은 정해진 장소로 이동해서 울타리 안에 갇혀 있다가 사람들의 선택을 받고 도살된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은 양들을 싣고 도시를 오고 갔는지 트럭 짐칸을 둘러싼 나무판자들이 낡아 보인다. 판자 사이로 얼굴을 내민 양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표정을 보고 감정을 읽어내기 어렵지만 사람인 우리는 양들이 죽는다는 걸 알고 있을지, 슬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 그들의 눈을 살핀다. 트럭이 지나갈 때면 마마는 한숨을 푹 쉬며 너무너무 슬프다고 말씀하신다. “너무”를 여러 번 붙이는 것 외에 더 표현할 길이 없으나 나는 마마의 얼굴을 살피고 가득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본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양을 직접 도살했다고 한다. 양 한 마리를 골라 집으로 데려 가 며칠 동안 극진히 대접해 준답시고 이것저것 배불리 먹이고 집 뒷마당이나 창고에서 죽였다. 양에게 최대한 공포심을 주지 않기 위해 칼을 뒤로 숨기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고 한다.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이 명절을 싫어했다. 마당이나 창고에서 양을 죽이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하고, 가끔 창고의 닫힌 문 틈으로 피가 새어 나오는 걸 봤다고 했다.
이 명절의 잔혹성을 말하는 근거로 동물을 직접 죽이거나 그 현장을 보는 행위가 잔인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라고 무조건 비판할 수 있을까? 누군가 살생과 도축을 대신해 준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가 직접 도축하는 것보다 덜 잔인하고 무해하다고 쉽게 재단하기 어렵다. 오히려 무섭고 구역질 난다고 생각하면서 격리시켜 둔 도살의 현장을 마주하는 일이 고기를 섭취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희생했는지 모른 척하지 않겠다는 용기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론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 양을 도살하는 과정에서 양에게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허가받은 사람들이 지정된 장소에서 도살하는 추세라고 한다.
옛날에는 평소 고기를 먹지 못하는 서민들이 부유한 집에서 마련한 양고기로 명절 하루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육식이 넘쳐 나는 지금,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이 한 동네에 섞여 살지 않고 서로 고기를 나누기도 어려운 시대인데도 여전히 수많은 양들이 희생된다. 사회적인 역할도 사라지고, 희생을 직접 마주하겠다는 경험도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천국으로 가는 점수를 올리는 종교적인 의식만 남아 있다. 과연 명절이라는 이유로 양을 도축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선행을 가장 가깝게 실천하는 방법인지 의문스럽다.
가족들은 무분별하게 도축당하는 양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희생절에 양고기를 먹기 싫어졌다고 한다. 겨우 한 마리의 양 밖에 살리지 못했다고 해도, 명절이 지나고 다시 고기를 소비할지라도 명절을 핑계로 양을 희생시키고 않으려 한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천국을 구하는 자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
명절이면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세요 대신 좋은 명절 보내세요 라는 인사를 건넨다. “이이 쿠르반 라르!” 하고 말하자, 남편은 풀어서 말하자면 “이이 쿠르반 바이람 라르”이지만 보통 “이이 바이람 라르”라고 말한다고 했다. “양을 희생하는 명절”을 줄인다면 수식어인 “양을 희생하는”을 줄이는 게 효율적이고 직관적인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명절이라고 말하면 마치 양들의 희생을 지우는 건 아닌가 싶고, 그렇다고 “이이 쿠르반”이라고 희생을 붙이자니 좋은(iyi) 희생이라고 말해도 되는걸까 망설여진다.
쿠르반 바이람라르. “희생절입니다.” 희생절에 사람들에게 어떤 인사를 건네야 할지 아직 적당한 인사말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