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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Oct 16. 2023

귀여운 야야라르 Yayalar. 거리를 걷는 존재들

길 위를 걷는 존재들의 도시

공사가 끝나지 않은 우리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부서진 벽돌, 꺾인 나무판자, 대리석 조각, 플라스틱 자재들이 쌓여 있다. 땅이 노곤노곤해지는 봄부터 부산물 더미에서 꽃들이 피어났다. 가늘고 긴 줄기가 하늘거리며 올라온 모습이 코스모스 같으면서도, 꽃만 보면 팬지처럼 꽃잎이 넓고 색이 선명하게 붉었다. 들꽃은 작고 수수한 줄 알았는데, 장미보다 더 짙게 핀 꽃들이 번영하여 밭을 일궜다. 봄이 지나고 능소화를 닮은 주황색 꽃이 넝쿨째 피기 시작했다. 당근꽃과 비슷하게 온점 만한 흰 꽃이 촘촘하게 꽃다발처럼 모여 핀 들꽃도 겅중겅중한 키로 자랐다. 

계절이 바뀌고 조금 황량해진 더미

오늘은 어떤 꽃들이 피고 질까? 집을 나설 때마다 꽃이 덮어버린 곳을 한참 바라본다. 언젠가 쓰레기 더미를 치울 때가 되면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벽돌을 놓아 견고한 바닥이 완성될 것이다. 저 꽃들을 포클레인으로 다 밀어버리겠지. 주인 없는 꽃을 옮겨 심을 생각 따위 아무도 하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 벽돌 사이에 자리할 들꽃들을 기대한다. 


저녁에 감자칩 한 봉지를 사서 먹다가 손가락에 묻은 짭조름한 시즈닝도 야무지게 빨아가며 거리를 걸었다. 페인팅나이프로 푹 떠서 팔레트에 뭉개어 펼친 물감처럼 구름을 잔뜩 섞어 놓은 하늘이 보인다. 밤과 낮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지금, 탁하고 어둡지만 모든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거리가 꼭 아포칼립스를 예견하는 것만 같다. 멀쩡하게 날고 있는 새들을 보며, 불안한 듯 빙빙 원을 그리며 낮게 날고 있다고 착각의 누명을 씌운다. ‘드디어 오늘 인가?’  지난봄 튀르키예 대선 이후 우리는 산책하면서 가끔 지구 멸망을 상상한다.


두 차례 치러진 선거가 끝나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나와 짝꿍은 종종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뽑았다 아니다”를 추측하며 논다. 누군가는 스트롱만(Strong man, 강한 남자)을 뽑았다고 자랑스러워할지 몰라도 우리에게 “뽑았을 거 같이 생겼다”는 말은 수치스럽다. 사람을 미워하고 폄하하는 대신 이해하고 보듬어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하루 즈음 “뽑았네. 딱 티 난다.” 식의 저급한 농담을 지껄이며 함부로 평가하고 낄낄거리고 싶다. 결론은 언제나 “인간 싫어. 인간 다 죽어야 해.”다.


우리와 속도를 맞추어 걷던 강아지가 우리를 추월해 앞질러 갔다. 부스럭부스럭 과자 봉지 소리에 먹을 거라도 주려나 보다 하고 기대했다가 한낱 과자인 걸 알고 포기한 듯했다. 강아지는 앞발에서 뒷발로 무게중심을 둔탁하게 옮기며 뛰다가, 풀숲에 숨어 단잠을 자던 고양이에게 달려들었다. 강아지가 고양이를 공격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거리의 동물들에게 식량 공급 외에 인간이 필요할 때가 많진 않지만 필요하다면 당하거나 쫓기는 쪽을 돕자고 종종 이야기했다. 역시 우리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고양이는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 이내 식빵을 굽는 자세로 앞발을 몸통 아래로 집어넣고 눈까지 감았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고슴도치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인도 옆 턱을 두고 두리번거리다가 몸을 주욱 늘여서 영차! 하고 올라섰다. 숨죽이고 고슴도치의 암벽 등반을 직관했다. 사람들과 차가 많은 도로보다는 공원으로 가는 편이 좋겠다 싶어, 슬그머니 공원 반대 방향으로 가서 섰다. 고슴도치는 머뭇거리다가 공원을 향해 오도도도도도! 걸었다. 천천히 서너 발자국 뒤에서 따라 걷다가, 풀숲으로 쏙 들어가는 고슴도치에게 돌려받지 못할 인사를 건넨다. 거기 벌레도 많고 숨을 곳도 많고 아늑할 거야! 재미있게 지내!

공원을 지날 때마다 종종 마주치는 고슴도치. 잘 살아남아 주길.

튀르키예어로 야야 yaya는 길을 걷는 사람을 뜻하며, 전쟁에서 말이나 다른 이동 수단 없이 걸어서 이동하는 병사, 보병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여기에 복수형을 뜻하는 “–lar”를 붙이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된다. “-lar”에서 더 많은 존재들을 떠올린다. 한때 튀르키예 정부는 여느 선진국처럼 안전하고 관리가 잘 된 거리를 만들기 위해, 길에 사는 동물들을 모두 보호소로 보내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다고 한다. 도시는 점점 넓어지는데 자꾸 도시 밖으로 정돈되지 않은 “무질서”를 전부 던져버리고 나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과 인간이 만든 것 투성인 도시에서 비인간 동물로 산다는 건 고향에서 전쟁터까지 걷는 병사들만큼 고단한 일일지도 모른다. 터벅터벅 길을 걷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조용히 인사하고 집 방향으로 몸을 틀 때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본 듯하다. 이곳은 야야라르 yayalar의 도시다.

야야라르를 늘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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