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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Oct 18. 2021

아빠, 우리 여행을 가요.

세 번째 공백


아빠,

우리 여행을 가요.


내가 아주 어릴 적엔 우리 둘이서도 이곳저곳 곧잘 다녔었죠. 그때의 나는 버스도 지하철도 타볼 일 없었던 어린 아이라, 동네를 잠깐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여행을 가는 기분이 들었어요.

기억하세요? 아주아주 어릴 때, 아빠의 한 팔에 안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아이였을 때 나는 아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버스에 올라탄 적이 있어요. 하차문의 바로 다음, 창가의 안쪽 의자에 당신은 자리를 잡고 저를 깨워 제게 창밖을 보라고 했어요. 그것은, 제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버스의 풍경이었어요. 노을이 예쁘게 지기 시작한 노란빛 하늘과 햇살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죠.​


그래서 버스를 타고 멀리 떠나는 걸 좋아했어요. 언젠가 엄마가 도시 외곽의, 버스 종착점에 위치한 학교로 발령 나신 적도 있었죠. 집에서는 차를 타고 가도 40분, 버스를 타면 1시간이 훨씬 넘는 먼 곳이었어요. 엄마는 아빠와 그곳에서의 일상을 생각하며 지원했다고 했어요. 엄마가 출근할 때 함께 나가서, 아빠는 근처의 텃밭에서 작물을 키우고 엄마와 점심식사를 하고, 퇴근할 때는 다시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무척 소박한 하루하루를 바랐다고 들었어요. 참 아빠다운 생각이구나 했죠.

덕분이라는 말은 우습지만, 그 덕에 저는 딱 한번 버스를 타고 그곳을 다녀온 적이 있었어요. 오래오래 버스를 타고 도착한 그곳에서 저는 우연하게도, 저의 오랜 선생님을 만났어요. 선생님은 저를 보자마자 정말 많이 컸구나, 잘 자랐구나라고 해주셨어요. 그때에 들은 ‘잘 자라주었다’는 말에, 지금와서 눈물이 나는 이유는 뭘까요.​


아빠, 나는 잘 자란 걸까요? 스스로 한심하고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아 마음이 텅 빈 것만 같고, 하루하루가 버거울 때마다 그냥 모든 걸 내려두고 떠나고 싶어져요. 멀리, 아주 멀리 내가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훌쩍 사라져 버리고 싶어요. 마음속에 떠오르는 먼 풍경이 가득한 곳으로 떠나면, 분명 나를 갉아먹는 모든 것이 달라지고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함부로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버리기엔, 이미 나는 어른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어른’이 된 우리들은 무엇 하나 쉬이 내려놓을 수 없죠. 일상 속에서 잠깐의 숨을 트일 틈조차 빠듯하게 매일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빠,

나와 여행을 가주세요.


꿈 속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겠죠.  오랜만에 가족끼리 다 같이 갈까요? 아빠가 가장 좋아하던 두터운 겨울 외투는 아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에 넣어야 할 거예요. 내가 가고 싶은 나라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거든요. 원래 사진 찍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특별히 사진도 같이 찍을 테니 우리 많이 남겨둬요. 생전에 남겨두지 못했던 영상도 많이 찍고 이야기도 잔뜩 나눠요. 내가 또 당신의 목소리를 잊기 전에, 우리 함께 많은 것을 남겨둬요.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면, 우리의 여행은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 묻어두고 나는 다시 내일을 살아갈게요.


그러다 당신의 목소리가 잊혀갈 즈음이 되면,

그래서 내가 또 힘에 부쳐 모든 걸 두고 떠나고 싶은 날이 오면,

그때 우리 다시 함께 여행을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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