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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Mar 29. 2022

엄마와 싸웠다.

열일곱 번째 공백

나는 외형적으로나 체질적으로나 엄마보다 아빠를 더 닮은 편이었다. 다만 고집부리는 이 성격만큼은 엄마를 꼭 빼닮았다. 엄마는 넌 성격도 아빠를 더 닮은 거라고 하시지만, 이 성격은 100% 엄마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어져 지내야 좀 더 사이가 좋아지곤 했다. 서로의 고집이 확실한 편이라, 사소한 것으로도 쉽게 투닥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떨어져 있다고 늘 사이가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늦은 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하는 길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 그러다 정말 시시콜콜한, 별 것 아닌 일을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엄마에게 이 '별 것 아닌 일'에 대해 얘기하며 듣고 싶던 말이 있었다. 그냥 막연하게 엄마가 그 말을 해주면 좋을 것 같았다. 평범한, 격려 같은 거.

하지만 엄마는 정반대의 말을 했다.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를 나무라듯이 쏘아댔다. 사실 정말 별 것 아닌 일이긴 했지만 엄마는 썩 내켜하지 않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었고, 나를 위한 선택이니 후회 없이 열심히 잘하고 싶어서, 일부러 시작하고 나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엄마는 왜 굳이 그랬냐며 화를 냈다.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지, 왜 엄마 말을 안 들어. 그러다 서로 감정이 격앙됐고, 나는 '이러다 한쪽이 먼저 전화를 끊어버리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너무 서럽게 눈물이 터졌다. 나는 엄마에게 그저, 이왕 네가 하기로 한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해보라는 격려나 응원의 한 마디가 듣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격려는커녕, 바로 다그치는 목소리에 서러움이 몰려온 것이다. 근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스트레스가 심한 상태였던 것도 한몫했겠지. 한참을 숨이 꺽꺽 넘어가는 목소리로 엄마와 실랑이를 부리다가, 둘 다 겨우 진정되고 나서야 엄마가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오늘 엄마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어. 근데 결과가 좀 안 좋게 나왔더라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엄마도 오늘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았어. 그런데 네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너는 또 갑자기 그런 말을 하잖아. 그래서 엄마도 순간의 감정을 못 참은 것 같아."


신경 쓰이는 말들이 여럿 지나간 것 같다.


"그럼 그냥 내 전화를 받지 말지 그랬어."


나는 엄마 카톡이 와있길래, 답을 보내는 대신 전화를 걸었던 건데. 내가 전화만 안 했다면 이렇게 싸울 일은 없었을 텐데.


"네 전화인데 어떻게 안 받아. 암만 피곤해도 네가 하루 마치면서 전화를 걸었을 때는 늘 이유가 있었는데, 당연히 받아야지."


그러니까 왜,


"네가 밤이 되어서 전화하는 날은 네게 무슨 속상한 일이 있거나, 힘들었거나 하는 일이 많았으니까. 그런 걸 네가 또 누구한테 맘 편히 털어놓겠어. 엄마라도 다 들어줘야지."


왜, 매번 이렇게만 되어버리는 건지. 우리는 늘 서로에게 잘해주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날이 많았다. 오늘도 그랬다.

한참을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결국 딴 소리를 했다.


"검진 결과는 왜, 어디가 안 좋은데."


엄마가 말하기 싫어하는 걸 기어코 캐물어서 대답을 들었다. 일순,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렇게 한바탕 크게 싸우더라도 결국 내게 엄마는 삶의 마지노선 같은 존재였다. 마지막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도록 나를 붙잡아두는, 열심히 살아야겠다 생각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였다. 또한, 내가 엄마마저 없는 미래 같은 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어린애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바라는 단 하나, 아빠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엄마가 아주 건강하게 아주 오래 사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만큼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근데 엄마, 오래 살 거잖아."

"당연하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연히 건강하게 오래 살 거야."


이제는 제대로 어른 취급을 받길 원하면서,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나만 생각하는 못된 딸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못해도 300년은 살 거야."

"야, 300년씩이나 살아서 어디에 써? 혼자 그렇게 오래 살아봤자 뭐가 좋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오래 같이 사는 게 좋은 거지, 혼자 몇백 년 사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300년 정도는 살아. 오래오래 살아, 엄마."

"지는 300년 같이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엄마한테만 그런 소리 하고 있어."


아마 그런 말을 하는 엄마는, '나도 300년 같이 살아줄게.'라는 내 대답을 은연중에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했다. 정말, 정말 이기적이게도 나는 엄마보다 오래 사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이별을 하고,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영원히 떠나보내면서 '남겨지는' 것을 수차례 경험해봤지만, 평생에 줄곧 적응할 수 없는 것 또한 바로 그 '남겨지는' 것이었다. 남은 인생 중에 가장,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탓에 허세를 부리 듯한 농담조차도 나는 건넬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라고 그것들이 다 쉽고 견딜만한 것들이었을까. 나보다 더 많이 '남겨지는' 것을 반복했을 텐데. 엄마는 그때마다 우리 때문에, 엄마니까, 우리를 위해서 그냥 참고 버텨냈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점이 우리 엄마의 가장 강한 점이기도 했다. 나라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통화를 마치고 나자,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차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실은 꾸준히 관리하면 금방 괜찮아질 수 있는 수치였고 정말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겁이 많고 이기적이어서, 욕심도 많아서, 너무 많이 미안해서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적어도, 엄마가 나를 위해 버텨냈던 시간들과 내게 쏟아냈던 엄마의 젊음만큼이라도

아니 그것의 절반만큼이라도 제발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만약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다면, 그 시간만큼 엄마가 계속 내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그냥,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어. 엄마가 나로 인해서도 충분한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 엄마가 나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 삶의 일부가 당신에게도 정말 잘한 일이었다고 여길 수 있도록, 나도 내 삶을 바쳐 돌려주고 싶어.


"아프지 마, 엄마. 계속 건강만 해, 그냥."

"너나 어디 다치지 마. 잠도 제대로 자고."


우리의 인사는 다정한 어투는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분명 같았을 것이다.

나도 노력할게, 미안해. 고마워. 미안해.

제발 우리 행복해보자.

오래,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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