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공백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호 Apr 13. 2022

내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아빠는 책을 읽었다.

열여덟 번째 공백

어릴 적의 이야기다.

다소 뜬금없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리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라도, 내 스스로 풀어서 답을 내기 전까지는 절대 답지의 풀이를 보지 않는 등의 막무가내식 공부법을 고집했다. 답을 내기도 전에 풀이를 보는 건 나에게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어떨 때는 겨우 한 문제를 푸는 데에도 몇 시간이 걸리곤 했다.

그래도 답을 맞히지 못하면 한 번 더 풀었다가, 그래도 틀렸을 때 겨우 풀이를 흘겨보았다. (전부 다 보는 것마저 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대학생 때는 시험대체 과제나 오픈북 시험이 훨씬 맘 편했던 걸 떠올리면-물론 아닐 때도 많았지만..- 그냥 어릴 적의 내가 정말 별종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이런 기질을 바득바득 유지하면서 몇 시간이고 열정을 쏟아낼 수 있던 건, 전부 아빠 덕분이었다. 아빠는 나의 무식했던 공부 방식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존중해주었다.


“아빠가 알려줄까?”


수학 문제가 막혀서 몇십 분째 골머리를 앓고 있으면, 아빠가 다가와 물었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풀어볼 거야. 진짜 진짜 못 풀겠으면 그때 물어볼게. 그러니까 지금은 절대 알려주면 안 돼!”


그즈음이 꼭 저녁을 다 먹고, 밤이 깊어가던 시간이었다. 즉, 아빠는 곧 자러 갈 시간이었다. (물론 나도 자야 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빠는 말했다.


“알겠어. 근데 아빠는 곧 잘 거니까, 모르는 문제 생기면 포스트잇에 써서 표시해둬. 그럼 아빠가 아침에 일어나서 풀이법 알려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아빠의 직업은 수학 선생님이 아니었다. 아빠가 수학 문제를 풀어본 것도 이미 수십 년 전일 것이다. 그때와는 교육과정도 다를 테고. 그런 아빠가 어떻게 나에게 수학 문제를 알려준다는 건지, 여기서 아빠의 말을 다시 주의해볼 필요가 있다.

‘아빠가 아침에 일어나서 풀이법 알려줄게’. 이 말은 즉, 아빠가 나에게 풀이법을 설명해주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문제를 직접 풀어보시고, 때로는 답지의 풀이를 참고하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설명을 미리 익혀두겠다는 뜻이었다. 이렇듯 아빠는 늘 내가 공부하며 속상한 일이 없도록 나를 배려해주셨다. 함께 공부하는 것의 즐거움도 알려주셨다.

그렇기에 그날의 나는 아빠의 말을 듣지 않고 새벽까지 수학 문제에 매달렸다. 모든 문제를 다 풀고, 아빠에게 깨끗하게 비어있는 포스트잇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럼 일찍 일어난 아빠가 나를 자랑스러워하시겠지? 뿌듯해하시겠지. 그럼 아빠도 다시 주무실 수 있을 테고,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난 나를 보고도 기특해하면서 칭찬해주시겠지! 그런 단순한 생각에서 비롯된 오기였다.

하지만 새벽이 깊어가는 동안에도 마지막 문제 하나가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다른 건 다 풀었는데, 이 문제 하나가 몇 시간째 풀리지 않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도저히 문제가 풀리질 않아서 속상함에 눈물까지 났다. 그리고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면서 아빠가 나왔다.


“… 딸, 아직 안 잤어?”

 아빠가 놀랐는지 나를 보며 물었다.


기어코 이른 시간에 깨어난 아빠를 보니 속상함이 배가 되었다. 아빠가 일어나기 전까지 다 풀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해서 아빠를 보자마자 대답도 없이 다짜고짜 울어버렸다. 그제야 아빠는 허둥지둥 나를 달래주었고, 다독여주었다. 그리곤 서재로 가시더니, 안경과 책 한 권을 꺼내와서 그대로 내 맞은편에 가 앉으셨다.


“네가 문제 다 풀 때까지 아빠도 같이 깨어있을게. 너무 늦게 자는 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아빠 딸은 마지막 문제까지도 다 풀 수 있을 거야.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 봐.”


그리곤 안경을 쓰며 먼저 책을 넘기셨다.

고요한 새벽, 컴컴한 온 집안에서 켜진 전등 하나, 돌아가는 시곗바늘 소리, 아빠가 책 낱장을 넘기는 소리. 한 번씩 안경을 들어 올리는 소리, 이따금 물로 목을 축이는 소리. 사각사각, 내가 문제 푸는 소리. 혼자가 아니어서 들리는 수많은 소리들이 고맙고 소중했다.

컴컴한 새벽, 거실의 창 밖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왔고 나는 드디어 문제를 다 풀었다. 정확히는 ‘답을 맞힐 때까지 끊이지 않던 풀이’가 드디어 끝난 것이다. 가장 어려운 문제의 답을 맞혔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그냥 아빠에게 물어볼까? 물어보고 얼른 자버릴까? 생각했지만 고개를 슬쩍 들면, 오롯이 책에 집중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나 때문에 괜히 이른 시각에 일어나 잠이 부족했을 텐데도, 줄곧 바른 자세로 앉아 나의 새벽을 같이 지새워 주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아주 큰 성취감과 그보다 더 큰 든든함, 따스함을 느꼈다. 내가 문제를 다 풀었다며 외치자, 나에게 ‘쉿’ 손짓하시다가 이내 너무 잘했다며 그럴 줄 알았다고 아빠는 한없이 나를 칭찬해주셨다. 그 어느 순간보다도 만족스럽고 벅찬 아침이었다.



***



이제는 나의 맞은편에서, 나의 새벽을 함께 밝혀주는 아빠가 없다. 혼자서 버텨내는 새벽은 무겁고 느렸다. 적막한 어둠이 다시는 개지 않을 것처럼 늘 시야를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내 시야를 뒤덮은 것은 한낱 구름일 뿐이었다.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여명이 있었다. 당신이 안겨준 오랜 따스함을 닮은 빛이, 하나둘 나의 새벽을 함께 밝혀주었다. 내가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에도, 나보다도 더 나를 믿어준 당신처럼. 내가 도착하는 데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끝에서 꼭 나를 기다려주었던 당신처럼.

빛을 가리던 구름의 존재를 깨닫자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보였다.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날의 나처럼.


그러니 아빠, 다시 한번 잘 부탁해.

당신이 개어주고, 당신이 덮어주었던 나의 새벽이 전부 밝아올 때까지

이 연약하고 질긴 이야기가 끝나는 종장까지

그때 그날처럼, 당신이 계속 지켜봐 주었으면 해.


열심히 살게. 열심히 살아볼게.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와 싸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