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공백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호 Jun 17. 2022

살아질 줄 알았는데, 잃어가고 있었다.

열아홉 번째 공백

나는 여전히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한없이 나약해지고 싶었다. 차라리 당신을 잃은 슬픔에 잠겨 죽을 것 같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툭치면 바스러질 것 같이 아슬했던 그때가,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큼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



남들이 내 사정 따위는 모르게 뭐든 잘하는 사람이고 싶다가도, 한편으론 내가 아무것도 못해도 그저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이길 바랬다. 어린 날에는 그 얄팍한 감정에 대한 대가로 얼마나 많은 당신을 흘려버렸는지, 세어보질 않았더니 어느새 기억의 마른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다.

매일같이 닳을 정도로 꺼내 본 아빠의 기억은 수시로 나의 약점이 되었다가, 두통이 되었다가, 수많은 눈물과 밤이 되었다. 매일 혼자서만 앓던 그것들을 가끔씩, 밖으로 내어놓으면 몇몇 사람들은 나의 무기력과 절망의 깊이를 이해해주곤 했다. 그것만이 내게 겨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릴 적에나 가능한 배려였다.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내 약점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너무나 쉽게 '편견의 꼬리표'가 되었다.
그래서 또 한참을, 혼자서만 꺼내어 곱씹었다. 그렇게 너무 오래 곱씹었더니 이제와서는 오히려, 아빠와의 기억들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내 세상의 전부를 뺏어간 것 같던 열병도 속으로 오래 앓으니 원인을 알 수 없어졌다. 드러내지 못한 미미한 열감만이 원래의 내 것이었던 듯 잔존했다. 아빠에 대한 추억도, 목소리도, 향기도, 너무 아득했다. 낯선 감각이었다. 차라리, 당신을 잃은 슬픔에 잠겨 죽을 듯이 괴로웠던 때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자부한 아빠가 내 삶에서 사라진 것이 10여 년. 내게 남은 당신의 의미를 오롯하게 지켜내고 싶어서, 나는 그저 당신 없이도 최선을 다해 살아갔을 뿐이고, 그탓에 당신의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하는 습관이 생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무엇도 지켜내지 못했다. 열의 해를 곱아가는 손가락 사이로 낡아버린 당신의 기억만 속절없이 날아갔다. 붙잡을 수도 없이 조용히 나를 스쳐갔다. 언제든 이해받아 마땅한 감정은, 한참 시간이 흘러버린 내가 들춰내기에 거추장스런 감정으로만 여겨졌다. 남들에게는 숨기고 감추는 편이 낫다고, 그렇지 못하면 때때로 나의 발목을 잡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나의 책임감만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아빠를 이야기하는 법을 모른다.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당신의 존재를 입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어렵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당신을,

당신과의 기억을

당신의 빈자리를 감추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진 자신이, 실은 진절머리가 난다. 아직 나에게는 원인을 잃고 부유물이 된 응어리가 남아있는데, 지금 와서는 이것이 당신에 의한 것이라 이야기할 수도 없어졌다. 끝없이 무언가 결핍된 듯한 갈증이 자리를 맴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어릴 적의 버릇대로 불러들인 우울감은 질척거리고, 24시간도 짧은 내 하루만 크게 뜯어먹는다. 홀로 바래고 닳은 당신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은 더 이상 나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나를 위로해주지 못하고 나를 더 힘들게 할 뿐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는 게 맞을까. 실은 아직까지도 아빠의 빈자리에 대한 내 그리움과 슬픔을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이 그저 나의 욕심일 뿐인 걸까.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냥 편하게만 들어줘.'라는 말로 포장하며, 내 이야기가 무겁게 들리지 않도록, 듣고 있는 상대방의 표정이 굳어지지 않도록 애쓰는 것도 실은 그만두고 싶은데.


어렵다. 10년이 넘도록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올바른 헤어짐이라는 걸, 누군가 나에게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아빠는 책을 읽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