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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Jul 02. 2022

멀쩡한 외계인.

스무 번째 공백

내가 먼저 당신을 입에 담기 전까지 세상은 당신에게 아주 작은 관심조차 없다. 꼭 당신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이제 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누군가를 아주 오래 관성적인 병처럼 그리워하는 것만 같아. 내가, 나만 이 세상에서 아주 조금 이상한 것 같아.

근데 알아, 당신에게 먼저 관심을 보일 세상이 더 이상하다는 거. 하지만, 글쎄. 세상도 좀 이상해지면 안 되는 걸까 싶어.


내가 어릴 때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당신에 대한 기억은 무엇인지

당신과 싸우고 펑펑 울었던 날은 언제인지

지금의 나는 언제 가장 당신이 보고 싶은지

여름이 되면 떠오르는 당신과의 추억은 없는지


가끔은 먼저 물어봐주는 세상이면 좋겠어.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야 당연하겠지, 다들 나를 배려해주는 걸 테니까. 나에게 먼저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조심스럽고, 물음을 건네는 건 걱정되고, 어쩌면

실은 그렇게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일 테니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게 무서워. 세상 앞에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걸 느껴. 두려워, 나의 일부는 여전히 과거에 남아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상의 눈들이. 언제라도 이런 내게서 눈감고 돌아설 것만 같은 세계가.


아주 평범한 당신의 이름 한 번 불러보는 걸 평생 눈치 보게 만드는 세상이 나를 어린아이인 채로 병들게 해. 지금 이 순간조차도. 미안해, 또 멋대로 쏟아내서. 신경 쓰지 마, 그냥 또 그런 날일 뿐인 거야. 잠깐 그런 기분인 시간인 거야.


나는 또 맛있는 밥을 먹을 거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거고,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며 살 거고,

잠도 아주 푹 잘 거고,

그래서 내일 또 웃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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