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5월 19일 ~ 25일
5월 2일 오전, 엄마 전화를 받자마자 주저앉았다. 아빠가 당장 죽을까 봐 슬펐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걱정됐다. 보고 싶었다. 괜찮다가도 돌아서면 눈물이 났다. 외줄을 탔다. 발을 살짝만 잘못 디디면 순식간에 훅, 쿵, 슬픔의 구렁텅이에 떨어졌다. 헤어 나올 수 없어서 결국 드러눕고는 앓았다.
친정에 와서 사흘을 지냈다. 새벽마다 성모당에 가서 촛불을 켜는 사람, 작은 택배 박스 하나만 있어도 바로 분리배출을 하러 나가는 사람, ‘나는 책을 읽어도 이래, 운동을 하면서 읽어야 된다.’하며 보면대에 책을 올려놓고 씩씩하게 걸으며 문장을 따라가는 사람, 라인댄스까지 추는 사람. 아빠는 여전히 부지런하고 귀여웠다. 안심이 조금씩 돋았다.
누구나 죽을 예정이다. 그 시점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오늘 저녁만은 아빠가 오래 살 것처럼, 10년은 살 것처럼, 여유를 부리고 싶다.
“오늘은 밥맛이 와이리 좋노.”
내가 사 온 한우를 맛있게 먹은 우리 아빠. 다음에도 또 새우살을 사 와야겠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아빠에게 한우를 사주고 싶다. 너무 욕심일까. 오늘 저녁만은 욕심을 부리며 마음을 푹 놓고 쉬기로 한다. 걱정은 내려놓고 입꼬리는 올려본다.
<대차게해봄>
우리 아빠도 대차게 암을 이겨냈으면
그런데 시계는 벌써 밤 아홉 시. 잘 시간이다. 내일 선명하게 살기 위해 자야겠다(‘롸잇나우’는 왜 외친 거냐). 신께서 내일도 허락해 주실 테다. 모레는 모르겠다. 내일은 분명하다. 딱 하루 앞만 보이는 삶. 그래서 불안하고, 그래서 느닷없이 행복해지기도 하는 인생.
이미 허락받은 오늘은 어떻게 하면 알차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남편과 포도에게 말해야겠다.
“내 옆에 존재해 줘서 고마워. 사랑해.”
내 눈앞의 사람에게 사랑을 건네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충만해진다. 환희가 번진다. 내일은 더 진해질 것이다.
<다시, 대차게써봄>
글감이 밀렸다.
부지런히 쓰자.
오늘부터는 다시 대차게, 힘차게 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번에 찾아온 우울은 왜 이렇게 질척대는 걸까. 우울한 이유를 헤아려본다. 아빠가 아파서, 치료해도 좋아진다고 장담할 수 없어서, 요가 수련을 못 해서, 내일도 또 못 해서, 책을 깊게 읽지 못해서, 나를 구원해 주는 문장을 찾지 못해서, 글을 마음껏 쓰지 못해서, 브런치 연재가 밀려서, 집이 뒤엉켜서, 치울 시간도 없어서, 새 반찬을 못 만들어서,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서울 집값이 자꾸만 저세상으로 올라가서, 저세상으로 따라 올라갈 사다리가 없어서, 지금 집보다 훨씬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야 해서, 2년 만에 이사, 또 이사, 또 이 짓을 해야 해. 그리고 아이스크림이 간절해서. 남편이 퇴근할 때 사 온다고 해놓고는 아직 무소식이라서. 흰색 물감을 들이부어도 암흑인 검정, 내 우울의 농도다. 키보드를 두드릴 힘까지 다 끌어모아 견뎌내고 있는데 역부족이다.
우울을 있는 그대로 써봤다. 글로 풀어내면 옅어지고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어봤는데, 전혀, 아니네. 몇 주 전 반짝이던 그녀, 그녀는 나였을까. 나의 우울을 아무도 몰라서 다행인 걸까. 남편에게 알려야 할까. 병원에 가야 하는 건가.
그런데도 매일 글을 쓰는 걸 보면 심각한 상태가 아닌 것 같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우울이 녹아내릴지도 몰라. 나뚜루 초코아이스크림 파인트 한 통에 희망을 건다. 초코아이스크림이 내 온몸에 가득 들어차면 나는 분명 달콤해지리라. 확신한다. 이런 날 먹고 환해지라고 초코아이스크림이 존재하는 거다.
<대차게써봄>
우울해도
어제는 우울했고 오늘은 괜찮았다. 괜찮았는데, 지금은 화난다. 천불 난다. 어제는 우울해서 키보드를 누를 힘조차 없었는데 방금, 키보드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너무 세게 쳐버렸다. 우울할 때는 문장이 흘렀다. 화나니 막힌다. 왜 화날까. 모르겠다. 막 화내고 싶다.
빼딱 구두를 신고 원피스를 입고 잘 나가던 내 인생, 내 인생을 망가뜨린 남편과 시댁 식구들, 그들을 원망해. 화날 때 마다 원망하는 것은 나의 사이클이다. 어김없이 한 사이클이 지나간다. 다 지나가리라. 다 지나가겠다는 말, 역겨워.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화를 뿜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다.
<대차게먹어봄>
또 초코아이스크림
초코아이스크림을 일곱 통이나 먹어 치웠는데도 우울했다. 매운 라면을 여덟 개나 끓여 먹었는데도, 온 주방에 청양 고춧가루 최루탄을 터트렸는데도 우울했다. 요가 수련에 결석했다. 책에 진탕 빠졌다. 우울 속으로 더 들어갔다. 그랬었는데.
내 글을 한 단어씩, 한 문장씩 차근차근 눌러 고치면서 우울함을 통과한 것 같다. 글이 단정해질수록 마음이 고요해졌다. 이 문장을 추가하니 생기가 돌았다.
<햇살이 스며드는 벌건 대낮, 파도 소리와 소나무 향기 사이로 서로의 몸을 오르내린다. 오, 야해. 여주인공이 말한다.
“현대사회를 살려면 남편이 최소 네 명은 필요해.”
오, 고발적이야.>
요즘 쓴 글을 퇴고한 후 일주일에 한 번 묶어 브런치에 올린다. 그 글로 연말에 있을 브런치북 공모전에 도전할 거다. 수상해서! 내가 수상한다고? 그래, 수상해서! 몹시 수상하지만, 말이라도 시원하게 지르자. 수상해서! 아빠의 암세포를 기쁨세포로 바꾸고 싶다. 아빠가 저 문장을 읽으면 민망할까? 할 수 없다. 안 쓸 수 없으니깐.
오늘 우울을 통과했다. 다 끝났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도 어쩔 수 없다. 끝났다고 치자.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으니깐. 다음에 또 우울이 찾아오면 긴 시간 동안 천천히 내 글을 다듬어야겠다.
<대차게해봄>
이럼에도 불구하고
저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씁니다.
매일 쓰면서
세상에 잘 쓰이는 날을 기다립니다.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고 있다. 남편은 소파에서 깔깔깔, 포도는 낮잠을 쿨쿨쿨, 나는 책을 술술술. 그리고 빈문서에 글자를 더하고 있다. 나를 둘러싼 현실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빠의 폐로 전이된 암,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 작은 집으로 이사, 잔금을 맞추려면 22% 손실을 삼켜야 하는 주식, 책과 영수증이 산처럼 쌓인 책상, 집안 곳곳에 흩뿌려진 포도의 장난감. 평화로운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마음은 잔잔하다. 좋다.
다 지나갈 일인데, 다 지나갈 감정인데, 왜 그리 괴로워하며 허우적댔을까. 아빠의 폐 전이 소식은 예방 주사였다. 아빠가 죽으면 내 삶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 뻔하니깐, 더 단단해지라는 메시지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아빠 곁으로 갈 수 있도록 운전 실력을 길러놓고, 장기간 집을 비울 수 있도록 일상을 정돈하며, 친정의 돈 이슈는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할 테니 준비하라는 의미였다. 가장 큰 혜택은(혜택이라니. 역시 난 긍정적이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처음으로 어렴풋이 마주했다. 죽음이 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더 오래 사는 데 집착하지 않겠다. 그저, 오늘, 지금, 괴롭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내일부터는 새벽기도를 시작하려 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어야 했을 시기를 씩씩하게 건널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새벽기도였다. 내가 다시 매일 할 수 있을까? 해봐야 알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봐야 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계속 새벽기도를 할 것이다. 그래야 슬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야 포도에게 단단한 엄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또 삶의 귀퉁이에 작은 깃발 하나를 꽂는다.
다시, 새벽기도.
108배 방석을 꺼낸다.
<대차게해봄>
새벽기도
오늘도 내 글을 다시 읽고, 고치고, 다듬었다. 남들은 ‘퇴고’라고 말한다. 내게는 나를 돌보는 시간이다. 누가 뭐라 해도, 돈이 전혀 되지 않아도, 가볍게 쓰려고 노오력까지 해도, 내게는 무척 중요하다. 의미 있다. ‘진심’이라는 부담스러운 말을 붙이며 촌스럽게 굴기 싫지만 진심이다.
마음에 남은 이야기를 안 쓰고는 못 배기는 인간이 되었다. 남은 것은 무엇일까. 상처, 슬픔, 좌절, 모두 스스로 만든 것. 나는 스스로 내 상처를 돌본다. 내일은 새벽부터 나만을 위한 한 줄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대차게돌봄>
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