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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 슬픔

25년 5월 12일 ~ 18일

by 대차게해봄

25년 5월 12일 월요일 / 가족들한테 다 알리란다


“의사가 가족들한테 다 알리란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캤다. 아빠가 마이 안 좋단다. 자식들이랑 상의해 보라고 카드라.”

병원이었다. 엄마는 휴대폰 너머에서 울고 있었다. 아빠는 또 다른 검사 중이라고 했다. 딱 3개월 전만 해도 나에게 분명 치료가 잘 되었다고 말했던 의사였는데. 오늘은 엄마에게 아빠가 마이 안 좋다고 말했단다.


슬프다. 어떻게 해도 슬프다. 1분이라도 빨리 자야겠다. 1분이라도 빨리 자야 꿀잠을 잘 수 있다. 1분이라도 더 꿀잠을 자야 이 슬픔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 나는 이 와중에도 아빠 걱정보다는 내 걱정이다. 나의 슬픔을 걱정하고 있다. 아니다. 내가 꿀잠을 자면 아빠와 엄마도 꿀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아빠와 엄마가 손을 꼭 잡고 평화로운 밤을 지냈으면 좋겠다. 나는 남편과 포도와 손을 꼭 잡고 평화로운 밤을 지낼 것이다. 우리 모두의 밤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대차게해봄>

평화를 빕니다.






25년 5월 13일 화요일 / 하루치 슬픔


“엄마는 오늘 포도가 정말 보고 싶었어.”

포도가 하원하면 나는 곧장 안아 올린다. 꼭 끌어안은 채로 느릿느릿, 차까지 걸어간다. 포도가 건강하게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감사기도가 터진다.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남편의 차가 아파트 정문을 통과했다는 알림. 평소처럼 울렸는데 오늘은 유독 크게 들린다. 포도와 남편이 모두 집에 오면 안심이다. 내 하루치 슬픔은 끝난다. 오늘의 슬픔은 끝났다. 내일 또 슬프려나. 내일 또 빨래를 개다가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려나.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잘 먹어도 점점 말라가는 아빠, 아빠 곁에만 있는 엄마. 엄마의 오늘치 슬픔은 끝이 났을까. 엄마의 슬픔에도 잠깐쯤 쉬어가는 시간이 있을까.


<대차게해봄>

오늘은 맞춤법도, 띄워쓰기마저도 완벽했다.

그런데 전혀 기쁘지가 않네.

오늘은 그런 날이다.






25년 5월 14일 수요일 / 마음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쌔빠지게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살면 육체와 영혼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드니깐. 괴로우니깐. 그런데, 이왕 사는 인생, 한 번 뿐인 인생, 아무래도 쌔빠지게 열심히 사는 게 맞는 것 같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일을, 지금 내 두 손에 잡히는 일을, 온 마음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해야겠다. 대신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한다. 결과를 전혀 바라지 않기로 한다. 이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 일이 나중에 어떤 결과가 되어 돌아올까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조급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즐겁게, 편안하게, 가볍게, 그냥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며칠 동안 읽고 쓰는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그런데도 글이 술술술 써졌다. 내가 삽질이라고 울부짖었던 지난 시간이 삽질이 아니었나 보다. 오늘에서야, 매일 연속으로 글 쓴 지 431일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주 조금, 정말 조금, 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미련하게 꾸역꾸역 쓴 시간이 허무하지는 않았구나.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내 글은 절대 글이 될 수 없다는 말. 내 글을 차마 ‘글’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시간. 쪽팔렸던 순간이 지나간다. 오늘은 다르다. 내 글도 글이라고, 이 연사 강력하게 외친다. 내 글도 글이라고, 강력하게 외치지 않아도 되는 날을 기다린다.


<대차게해봄>

슬퍼하는 건 아빠가 죽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아빠가 살아 있는 지금은

온 마음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하루를 살자.

나는 오늘을 쓴다.






25년 5월 15일 목요일 / 아빠 죽고 나서 울어도 늦지 않아


아빠는 더는 치료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엄마와 언니도 그러자고 했다. 간 절제, 방사선, 항암 수차례, 색전술을 세 번이나 해도, 암은 간과 담관과 폐에 퍼져 있단다.


그런데, 사실, 나는, 믿을 수 없다. 의사에게 직접 내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전해 들어서 그런가. 어쩌면 아주 조금만 더 치료하면 아빠가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 수 있는데 그 약간의 치료를 아빠가 거부하시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눈물이 나다가, 운다고 아무것도 못 하면 나만 손해지, 세수하고 로션을 발랐다. 로션을 바르면 뭐 하나, 눈물이 로션을 다 씻어내렸다. 로션 아까워, 울어봐야 나만 손해지. 오늘 같은 날 안 울면 언제 우냐, 오늘은 펑펑 울어보자. 펑펑 우는 건 아빠 죽고 나서 울어도 늦지 않아, 울지 말고 어여 자자. 스스로 달래고 어르다 글을 꾹 다문다.


<대차게웃고싶음>

“하늘에서 오라카면 가야지. 우야노.”

아빠는 웃으셨다.

“맞따, 맞따, 우야겠노.”

나도 웃었다.

웃었으면서

지금은 눈물이 줄줄줄.






25년 5월 16일 금요일 / 아빠의 손등과 포도의 볼이 맞닿는 순간



오늘 아침, 아빠와 전화 통화를 했다.

“엄마 눈에 핏줄이 서가. 안과에 델따주고 금방 집에 왔다.”

아빠는 늘 이런 분이다. 아무리 코 앞이라도 엄마를 데려다주고, 또 데리고 오신다.

“아빠, 내일 아침에 계약서 쓰고 대구 내려갈게요.”

내일은 실거주용 아파트 매수 계약서를 쓰는 날이다. 매도자의 사정으로 많이 미뤄졌다.

“야야, 너거는 우에 그래 사고팔고를 잘하노. 대단하다. 절대 서두르지 말고, 뭐든지 항상 천천히 해라. 그카고 내일 안 와도 되는데 와오노.”

“아빠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봐야지.”

“내 바로 안 죽는다. 사람이 뭐 쉽게 가는 줄 아나? 그래 쉽게 안 간다. 내가 하루라도 더 살 거니깐 너거는 절대로 걱정하지 말고.”

아빠의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그 한마디에, 나도 기운이 났다.

“아빠,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뭐 사 갈까?”

“집에 뭐가 짜다리 많다. 말이라도 고맙다.”


포도에게 할아버지가 아프다고 말했더니, 첫마디가 이거였다.

“그러면 이제 할아버지 우리 마중 못 나와?”

늘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던 할아버지가 포도는 좋았나 보다.

“그래도 마중은 나오실 거야.”

아빠는 내일도 주차장에서 우리를 기다릴 거다. 우리 차를 보자마자 춤추며 손을 흔들 거다. 포도를 보고는 “아이고, 이뻐라, 우리 공주님.” 하실 거고, 그러면 포도는 제 볼을 할아버지의 손등에 비비고 할아버지를 안아줄 거다.


내일은 그 장면을 더 깊이 눈에 담아야겠다. 사랑하는 아빠, 아빠의 기도로 태어난 포도, 아빠의 손등과 포도의 볼이 맞닿는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보고 싶다.


<꿋꿋하게해봄>

“나 좀 위로해 줘.”

남편에게 말했다.

“이럴수록 꿋꿋하게 살아야지.”

남편은 대차게 말하고는 안방으로 휙 들어갔다.






25년 5월 17일 토요일 / 피부 좋다는 소리를 할 수밖에


“야야, 너거 몇 시에 도착하노?”

친정 가는 길목에서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5시 20분쯤이요. 안 나와도 돼요. 짐이 별로 없어요.”

“아이다. 내가 나가야지.”


친정 아파트 지하 주차장, 아빠는 어김없이 거기 서서 우리를 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라고, 여기 빈자리가 있다고. 포도는 차 안에서 소리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빠는 분명 나보다 덩치가 좋았는데, 똥배도 있었는데, 얼굴이 반쪽 이하였다. 볼이 옴푹 패인 우리 아빠.

“아빠,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 얼굴에서 광이 나네, 광이 나.”

아빠를 붙잡고 더 살아달라고, 우리 곁에 더 있어 달라고, 엄마는 아빠가 있어야 한다고, 아빠 없이 엄마 혼자 어떻게 사냐고, 차마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깐, 피부 좋다는 소리를 할 수밖에.


아빠가 저녁 미사에 간 사이, 엄마는 내게 질문 폭탄을 퍼부었다. 항암 말고, 수술 말고, 아빠가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 뭐냐고. 그리고 아주 현실적인 고민까지.


오늘 같은 날은 백수라서 참 좋다. 엄마의 현실적인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으니깐. 자세하게 알아봐야겠다. 연금, 보험, 증여, 상속 등등등.


<기도해봄>

만일 아빠가 멀리 떠난다면

내가 친정에 왔을 때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잘 할 수 있고

엄마도 덜 무너질 것 같다.






25년 5월 18일 일요일 / 우리 포도, 귀 트이려나


친정살이 이틀째. 아빠랑 엄마랑 나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쌓인 얘기가 어찌나 많던지 말이 말을 불러왔고 그 사이 포도는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그래서 포도에게 하루 종일 캐치티니핑을 보게 해줬다. 대신, 영어로.


아빠와 엄마와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포도의 캐치티니핑도 무한 재생되었다. 아빠, 엄마를 챙기느라 포도를 방치했다. 딸 노릇을 하느라 엄마 노릇은 빵점이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하루 종일 영어로 캐치티니핑을 보면 우리 포도, 귀 트이려나.


<대차게해봄>

긍적적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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