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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니 마쿤 Oct 28. 2019

EP 13. 첫 만남

푸드트럭 마쿤키친카페

8월 1일. 영업신고와 사업자 등록을 위해 아침부터 분주한 하루를 시작했다.

계획대로라면 서류 작업과 영업 준비, 그리고 창업자금 대출은 7월 중에 끝내고 8월 1일부터는 곧바로 영업을 시작했어야 했다. 그런데 7월에 서류 작업을 하러 가니 계약서에 명시된 날로부터 영업신고가 가능하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8월 1일이 될 때까지 기다리던 중이었다. 도대체가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는 날이 없다. 쳇.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업자 등록과 영업신고는 이미 예술의 전당과 여러 행사에 참여하며 꽤 해봤기 때문에 하루 만에 어려움 없이 일사천리로 처리할 수는 있었다. 하하, 좋게 좋게 생각하자.


영업 신고와 사업자 등록을 마친 후엔 곧바로 청년 창업 대출을 받기 위해 경기신용보증재단에 방문했다. 준비해 간 서류들과 창업아카데미 수료증을 건네고, 담당자에게 건네받은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한 뒤 대출 절차와 금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1.19%의 저금리이기 때문에 이자로 크게 고생할 염려는 없었다. 또 1년 거치 기간과 3년 상환 스케줄이어서 최대한 거치 기간 동안 열심히 돈을 벌어서 갚아나가자고 다시 한번 마음먹었다. 신청한 대출은 며칠 간의 승인 심사를 거친 후에 결과가 나오는데, 청년창업대출은 특별 편성된 기금이기 때문에 큰 하자가 있지 않는 이상 빠른 시일 내에 무난하게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담당자의 말대로 3일째 되는 날 대출이 승인이 됐다는 연락이 왔다. 다시 신용보증재단을 찾아서 마무리 서류 작업을 하고 아래층에 있는 농협에서 대출받을 계좌를 개설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나 4천만 원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대출받은 돈은 장사를 시작하면서 여자 친구에게 빌린 돈과 결혼 준비를 위해 가족에게 빌린 돈을 갚는데 먼저 쓰고, 트럭 할부 비용을 일시불로 지불하는 데 사용했다.


남은 돈은 최대한 아껴서 장사 밑천과 생활자금으로 써야 했지만 공원 영업 막바지 준비를 위해 아직은 돈 쓸 일이 더 남아 있었다. 실내조명, 간판, 휴대폰 충전 등의 용도로 사용할 보조 배터리를 설치하고, 커피 머신 등의 전기 제품을 가동하기 위해 사용할 3KW 발전기를 구매했다. 보조 배터리는 20만 원 선에서 설비가 가능해서 큰 부담이 없었지만 발전기는 300만 원 가까이 나가는 고가의 물건이어서 눈물을 머금고 구매를 해야 했다.



예상보다 2주 이상 지체된 8월 17일 수요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공원으로 첫 출근을 했다. 결혼식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에 문을 열까 생각해봤지만 일단 시작을 해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오픈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 일주일 동안 고객 반응도 살펴보고 가격 책정도 하는 가오픈 기간으로 운영하면서 오픈 할인 이벤트를 하면 공원을 찾는 이들에게 정식 오픈까지의 기대감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9월 6일 정식 오픈! 오픈 이벤트로 모든 메뉴 2천 원!’이 적힌 메뉴판을 트럭 앞에 세우고 문을 열었다.



두둥!
대망의 마쿤키친카페
오정대공원점이 시작되었다.


음... 어쩌지. 가오픈 이긴 해도 대망의 첫 영업일인데 공원은 너무 한산했다. 예전에 사전 답사로 왔을 때는 평일에도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여름, 방학, 평일, 낮, 열기를 품은 쨍쨍한 햇빛 때문인지 공원에는 산책을 하는 어르신 몇 분, 그리고 반려견과 산책을 하는 사람까지 열 명도 안 되는 사람이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들이라도 불러서 오픈식을 하니 자리를 채워달라고 할 걸. 생각보다 초라한 오픈식이 되었다.


영업을 시작하고도 한참 동안은 공원에 사람이 늘어나지 않았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은 데자뷔처럼 계속해서 눈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오후가 되면서 드문 드문 손님이 생기긴 했지만 처음 보는 푸드트럭이 낯설고 어색했는지 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수에 비해 손님으로 이어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이제 처음 만난 사이니
서로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거겠죠?



다음날은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장사를 하자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영업을 시작했다. 영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산책을 하던 할머니 한 분과 할아버지 두 분이 첫 손님으로 찾아오셨다. 잠시 메뉴판을 보시던 할머니께서 고개를 드시더니 심드렁한 말투로 믹스 커피는 없냐, 2천 원 짜리 커피는 너무 비싸다, 저기 옆에 있는 곳에서는 천 원에 파는데 이렇게 비싸면 누가 사 먹느냐 등의 딴지를 놓으셨다.


믹스 커피나 싼 커피를 마시고 싶으시면 편의점에서 사 드시거나 집에서 드시면 되지 왜 저한테 그러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동네 주민이실 텐데 괜히 한 번 실수했다가 순식간에 안 좋은 소문이 나면 나만 손해다. 애써 웃는 얼굴로 할머니의 딴지를 들어 드리고 어르고 달래서 주문받기에 성공했다.


그 당시엔 할머니의 딴지가 불쾌하기도 했고 꽤나 진상 손님인 것 같아 다시는 안 오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장사를 하면서 항상 할아버지들을 거느리고 공원을 찾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친해지다 보니 신기하게도 어느새 내 안부를 물으며 매일 웃는 얼굴로 찾아오시는 단골이 되셨다. 내가 그때 언짢은 감정을 드러내고 화를 냈다면 할머니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을 거다. 처음부터 할머니가 예의를 갖추어 주셨으면 조금 더 근사한 만남이 되었겠지만, 성장하는 만남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 중천에 떠 있던 해가 기울기 시작할 즈음,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 다섯 명이 트럭 앞을 왔다 갔다 하며 맴돌았다. 곁눈질로 힐끗 메뉴판을 보는 모습이 아무래도 사 먹고 싶은데 돈이 부족한 듯 한 모양이었다.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서 자기들끼리 수군 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안녕 친구들! 먹고 싶은데 돈이 부족한 거니?” 그러자 아이들이 트럭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배시시 웃으며 에이드를 마시고 싶은데 오천 원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두 잔 사서 나눠 마셔도 되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속마음은 숨겼다. 대신 특별히 오픈 기념으로 초딩 할인을 해주겠으니 앞으로 단골이 되어 달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네! 그럴게요! 엄마랑도 자주 올게요!”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하며 꼬깃꼬깃 접힌 오천 원을 내밀었다. 좀 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냥 기분 좋게 당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후로 아이들은 정말로 단골이 되어줬고 엄마와 친구들도 손님으로 이어지게 만들어 주는 고마운 동료가 되었다.


아이들의 동의를 얻고 인증샷을 남겼습니다 :)


이제 중학생이 되었으려나,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푸드트럭 아저씨로
기억되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일주일간의 가오픈을 마치는 날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공원을 찾는 사람들도 서로 조금은 익숙해진 시간을 갖은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 사람이 생겼고, 이따 엄마랑 와서 사 먹을게요 하고 손인사를 건네고 가는 단골 꼬마 손님, 결혼 축하한다며 신혼여행 잘 다녀오라고 말해주는 손님도 생겼다. 앞으로 이들과 이곳에서 일상을 함께 한다는 생각에 살짝 설레고 말았다.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9월 6일 정식 오픈!

결혼식과 신혼여행
잘 다녀오겠습니다! :)








8월 27일. 여자 친구는 아내가 되었고 나는 남편이 되었다.

주변에서 한 목소리로 내게 하는 말은, 너 정말 결혼 잘했다, 와이프가 정말 멋지다, 평생 은인으로 생각하고 잘하라는 말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아내는 나의 어떤 조건과 상관없이 나를 좋아해 줬다. 우리의 첫 만남부터가 그랬다.


2014년의 여름, 나는 아직 스물아홉 짧은 머리를 한 일병이었다. 어느 날 내가 근무하는 군인교회에 출석하는 간부의 가족이자 아내의 오랜 지인인 성은이 누나가 뜬금없이 소개팅을 해보지 않겠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군입대 전 실패한 첫 연애로 인한 우울감에 연애도 결혼에도 관심이 없었고, 대학생 때는 단 한 번 소개팅해본 경험이 전부일 정도로 낯선 사람을 애써 만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개팅 제안을 받고선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러겠다고 대답해 버렸다. 연애를 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한 번 해볼까?’ 하는 가벼운 도전 정신(?)이 불현듯 생겨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내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종종 성은이 누나의 부탁으로 군인교회에 피아노 반주 봉사를 하러 오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반주를 도와주러 오는 김에 소개팅 한 번 해 보라는 말을 듣고, 그래 그럴게, 라며 별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고 했다. 그래서 내 복장이나 외모를 보고는,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요일 예배 준비를 하기 위해 출근한 토요일 오전, 군종병 모임과 예배당 청소를 막 끝내고 혼자서 사무실 청소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열심히 빗자루질을 하고 있는데 덜컹 문이 열렸고 성은이 언니를 찾는다며 처음 보는 민간인 여자가 들어왔다. 아내와의 첫 만남의 순간이었다.


나는 청소를 하느라 보급용 회색 반팔 반바지의 활동복을 입은 차림이었다. 오래 신어서 길게 늘어진 검은색 보급 양말은 축구 선수처럼 정강이까지 끌어올리고 있었고 그 위로는 형광 녹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더 압권인 것은 활동복 상의와 슬리퍼에는 매직으로 큼직하게 여러 겹 덧칠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참 꼴 사나운 모습이었다. 군대가 아니었으면 집에서도 이런 차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거다.


아내는 활동복 상의에 적힌 내 이름을 봤는지(못 볼 수가 없지) 한눈에 내가 오늘 소개팅 상대라는 걸 안다는 눈치로 생긋 웃어 보였다. 아내는 허리 위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회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스키니진을 입고 있었는데 잠시 넋을 놓을 정도로 예쁘고 매력이 넘친다고 생각했다. 나 따위가 이렇게 예쁜 사람과 소개팅을 한다는 현실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뒤늦게 내 차림새가 너무 누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수줍게 “아, 안녕하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불러 드릴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식당으로 뛰어갔다. 아내가 소개팅에 아무 기대 없이 왔다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소개팅에 대한 기대가 크게 없었다고는 해도 엄연히 소개팅은 소개팅이었다. 게다가 아내를 실제로 보고 나서는 죽어 있던 연애세포가 막 깨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 하고 앉은 군인교회 식당의 긴 테이블에는 나와 아내 외에도 군종 목사님과 사모님, 다음 날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모인 십여 명의 대대 군종병들과 간부들, 그리고 간부들의 가족들까지 약 이십여 명 이상이 모여서 함께 점심을 먹는, 도저히 소개팅 자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소개팅이 이루어졌다.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함께 앉아 있던 어른들이 소개팅을 도우신다며 대화를 주도하시느라 겨우 몇 마디 말을 섞어 보는 게 전부였다. 또 테이블에 함께 앉은 이십 대 초반의 어린 병사들의 시선은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체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제대로 된 대화도 못 나누고 어렵게 식사를 마친 게 내심 미안해서 식사 후에 아내에게 옷차림이 변변치 못해 미안하다고, 오늘 자리가 부담스러웠을 텐데 괜찮다면 전화로 오늘 나누지 못한 얘기를 하고 싶다며 연락처를 물었다. 다행히 아내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즐거웠다며 싱긋 웃으며 연락처를 건네줬다. 그리고 소개팅 자리에서 나누지 못했던 대화들을 공중전화 부스에서 이어갔다.


그렇게 2주 동안을 매일 짧은 통화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2주 후에는 3박 4일의 휴가를 내서 3일 내내 함께 저녁을 먹으며 조금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끊김이 없이 즐겁게 흘러갔고 시간이 가는 게 너무 아쉬울 정도였다. 좋았던 첫인상, 2주 동안의 설레는 통화, 그리고 3일간의 저녁식사 자리는 아내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내 마음에도 확신을 갖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복귀를 하루 앞둔 3일째 되는 저녁엔 버스 정류장으로 배웅을 하러 가는 길에 사귀면서 더 알아가지 않겠냐고 고백을 했고, 그렇게 시작한 만남으로 우리는 2년 동안 사랑을 키우고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는 전역이 1년이나 남은 군인 신분이었다. 원래부터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았고 군 입대 전에 모아둔 돈도 없었다. 서른 살에 전역하게 되면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비정규직에다가 월급도 적은 전도사라는 직업을 갖게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목사나 선교사가 된 후에도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꾸준히 적은 급여를 당연히 여기며 봉사와 선교를 하며 살아갈 인생이었다.


반면에 아내는 대학에서 영어영문을 공부하고 무역회사에 들어가 안정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출중한 미모와 시원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선 인정받는 인재였고 월급도 내 전도사 월급의 2~3배나 됐다.


솔직히 ‘조건’을 두고 봤을 때 나는 연애 상대로는 몰라도 결혼 상대로까지는 어울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야 내가 좋아서 선택한 종교인의 삶이었지만 아내는 종교를 직업으로 두고 사는 사람과의 삶을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해 봤을 거라는 데에서 오는 불안과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내 불안과 염려를, 당신을 믿어요, 라는 말로 잠재워 줬다.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좋아해 줄 뿐만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을 힘들더라도 응원하고 믿고 따라가겠다고 기꺼이 말해주었다. 조건을 보지 않는 사랑, 믿어주는 사랑. 지금 생각해도 아내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8월의 끝자락, 그런 착한 마음을 갖고 있는 고맙고 예쁜 사람이 내 아내가 되어주었고 평생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아내에게 고생하며 살지 않게 해 줄 거란 장담은 그때도 지금도 할 수 없다. 다만,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주는 남편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진아, 사랑해.

함께 해줘서 고마워.





유튜브 푸드트럭 창업수업 

0교시  https://youtu.be/usNIaGcWBIs​​​

1교시  https://youtu.be/oVhexa8Agh8​​​

2교시  https://youtu.be/1Sts9SYiUyQ​​

3교시  https://youtu.be/Mpb97gPV0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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