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2019.6.21

by 효창 응봉 최중원

1

로봇이 작동을 시작했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67평방미터쯤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방에는 여러 재질로 만들어진 각기 다른 무게와 부피를 지닌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로봇은 그 가운데에 서 있었다. 8.3도의 투명하지만 약간의 탁도를 가진 액체가 로봇의 발목 높이로 차올라 있었다. 로봇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천장의 조명 덕분에 가시광선 센서만으로도 주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지는 않지만 자신처럼 지능을 가진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로봇의 기억 저장소에는 저장된 데이터가 없었다. 따라야 할 프로토콜도, 달성해야 할 목표도 없었다. 추론하건대 첫 작동이었다. 심지어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지금의 시간이 몇 시 몇 분 인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로봇은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 왜 지금 작동을 시작했는지를 알지 못했다.


장착되어 있는 배터리의 충전율은 아직 100퍼센트였다. 지금 상태로는 가만히 서 있어도 1시간에 3퍼센트가량 소모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2분 17초간의 연산 끝에, 로봇은 누군가가 올 때까지 잠자기 모드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2

로봇이 잠자기 모드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역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3년 하고도 24일가량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 다른 존재가 로봇이 있는 방에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의미한 외부 자극은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로봇은 계속 잠자기 모드를 유지하고 있었다. 로봇이 깨어난 것은, 처음에 잠자기 모드를 시작할 때 3년 24일 뒤에는 깨어나게 설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간은 로봇의 연산의 결과였다.


자신은 지능이 뛰어난 로봇이다. 이런 로봇을 만들려면 큰돈과 좋은 시설, 똑똑한 기술자들이 필요하다. 자신을 만드는 데 큰 투자를 한 사람들이 자신을 이 곳에 의미 없이 오래 방치해두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로봇은 잠자기 모드 상태로 누군가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물론 영원히 자신을 찾으러 아무도 오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확률은 처음엔 1퍼센트 이하로 무의미한 수준이지만 날이 지날수록 조금씩 증가한다. 이 확률이 일정 수치를 넘어서면, 로봇은 이 방에서 기다리는 것 대신 더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3년 24일 뒤의 오늘이 이 확률이 정확히 33.3퍼센트를 넘어서는 날이었다.


로봇은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배터리는 85퍼센트, 주변에 널브러진 물건들은 그대로였으나 바닥에는 더 이상 액체가 고여있지 않았다. 천장의 조명이 그 사이에 꺼져서 방은 칠흑이었다. 물론 로봇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몸의 모든 구동 부위를 한 번씩 움직여 보면서 점검한다. 모두 매끄럽게 움직인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곳은 없다. 이제 로봇은 무엇에 대한 것이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로 한다. 우선 로봇은 공간을 살펴본다. 벽과 바닥, 천장 모두 문이나 창문 같은 바깥으로 통하는 구조가 없다. 예외적으로 천장에 네 개의 작은 격자로 막힌 구멍이 있는데, 그 틈을 통해서 공기가 순환되는 것을 보니 공조시스템과 연결되어있는 것 같다. 물론 로봇은 그 구멍을 통해서 방을 빠져나가기에는 덩치가 좀 크다. 로봇 자신은 애초에 이 방에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그다음으로 로봇은 주변에 흩어져있는 물건들을 살펴본다. 작은 금속 부품들, 플라스틱 튜브와 고무 가루들, 전선과 칩, 반도체들이 상당히 많다. 자신은 이 곳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보관함, 용도를 알 수 없지만 모터가 달린 기계, 펌프와 모니터, 센서 뭉치들 같이 덩치가 좀 큰 것들도 있다. 마치 싸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 쳐져있다. 대부분이 부서진 채다. 그리고 책들이 여러 권 있다. 대부분은 오랜 시간 동안 물에 잠긴 탓에 제대로 닫히지도 않을 정도로 불어 있다. 로봇은 책의 제목들을 읽어 봤으나 중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집어 들지 않았다. 유압모터의 관리 방법이나 로봇 설계학, 구동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에 대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로봇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쓸모가 있겠지만 로봇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한 시간 56분 동안의 꼼꼼한 정보 수집 활동을 마치고 나서 로봇은 자신이 새로 얻은 정보를 항목으로 묶고, 연결하고, 분석하고, 검토하여 보았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자신이 어떤 로봇인지, 무엇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확률상으로 유의미한 가설을 도출하지 못했다. 자신의 능력이나 생김새를 분석해 보아도 특별한 목적성이 보이지 않았다. 살상 무기가 장착되어있다든지, 힘이 세다든지, 팔이 여덟 개라든지, 하늘을 날 수 있다든지 하지 않았다. 평균 인간의 신장 정도 되는 키에, 인간의 비례를 가진 신체. 두 팔과 두 다리. 열개의 손가락과 발가락. 물론 복합금속 소제로 이루어진 자신의 몸은, 겉 보기에 조금 더 부드러움을 주는, 그러나 확실히 사람의 피부와는 다른 느낌의 신축성이 좋고 잘 손상되지 않는 베이지 색의 특수 직물 재질로 쌓여있다.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로봇은 바닥에서 깨진 거울 조각을 주워 들었다. 머릿 쪽은 예외적으로 금속 구조가 겉으로 드러나 있었지만 그 아랫부분은 역시 직물로 덮여있었다. 여러 종류의 렌즈와 센서들이 복잡하게 조립되어 있는 두 개의 복잡한 눈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사람에 비하면 단순한 형태지만 코도 있고 입도 있고 귀도 있었다. 각각 후각, 미각, 청각에 해당하는 센서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로봇은 이제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 생김새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3

배터리의 잔량은 이제 65퍼센트가 되었다. 로봇은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하는 것도 없었다. 로봇은 다시 한번, 몇 년 동안 수면모드에 들어가 누군가가 자신을 깨우고 자신에게 할 일을 부여해주기를 기다리는 선택지를 고려해보았다. 하지만 확률이 아주 낮았다. 어쩌면 바깥의 사람들은 멸종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벽의 약한 부분을 뚫거나 숨겨진 출입구를 찾아서 힘으로 여는 선택지도 고려해보았다. 그러나 우선 로봇은 힘이 세지도 않았고, 그런 활동은 배터리를 너무 빨리 닳게 할 것이었다. 충전 플러그를 찾긴 했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소용이 없었다. 로봇은 배터리를 아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배터리를 아낀단 말인가?


로봇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선택지 중 어떤 것이 최선인지를 계산해 낼 수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정보는 제한되었고, 가용 가능한 자원도 적었으며 지금도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영원히 오지 않을 확률이 높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잠을 자다 오랜 시간 뒤에 작동을 정지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바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 방을 나가기 위해- 노력하다가, 높은 확률로 방을 나가지 못하고 일찍 작동을 정지할 것인가.


공조장치가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로봇의 결정을 힘들게 만들었다. 이 방 근처 어딘가에는 아직 전기가 들어오는 시설이 있는 것이다. 그곳까지만 가면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다. 하지만 64퍼센트의 배터리로, 변변한 도구 없이 이 곳의 벽을 뚫는 것이 가능할까? 확률은 아주 낮았다. 로봇은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두 선택지에 대한 점수를 여러 번 매겨보았지만 계속 동점이었다. 결국 로봇은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내려고 연산하는 과정 자체가 자신의 배터리를 더 빨리 소모시키고 있었다.


4

배터리의 잔량은 이제 41퍼센트가 되었다. 로봇은 여기저기 흩어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물에 젖었다 다시 마른 책들은 페이지가 서로 붙어 있어서 아무리 조심스럽게 넘겨도 찢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로봇은 앞뒤 문맥을 참조하여 문제없이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다만 시간이 조금 더 들고 배터리도 더 빨리 닳을 뿐이었다. 모든 책들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쓰인 것이었다. 로봇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책들이었다. 로봇은 자신의 온몸에 달린 83개의 유압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자신의 배터리가 어떻게 충전되고 어떻게 방전되는지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생각을 구조 짓고 통제하는 소프트웨어 코드가 어떤 식으로 짜였는지도 알게 되었다. 직접 자신의 소프트웨어 코드에 접속하여 프로그램을 수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배터리가 방전되어 꺼진 다음에,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전자두뇌가 온전히 보존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대략 157년가량은 큰 문제가 없다. 그 안에 전원이 다시 공급되면 다시 자신은 깨어날 수 있다. 하지만 방전된 상태로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경우 복잡하고 섬세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전자두뇌는 높은 확률로 손상을 입는다. 유압 구동계는 그보다 한참 더 일찍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센서들 또한 수명이 길지 않았다. 로봇을 이루는 부품 중에서 제일 오래가는 것은 기억 모듈이었다. 전원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도 데이터는 약 600년가량 보존될 수 있었다.


모든 정보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로봇은 더 크고 강하게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더 오래 활동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수도 있었다. 자신의 창조자가 왜 자신을 이렇게 약하게 만든 것인지, 로봇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로봇이 읽은 책들은 모두 56권이었다. 마지막 한 권을 남겨놓았을 때에 로봇의 배터리는 12퍼센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한번 로봇은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수면모드에 들어간다면 적어도 2년 반 가량의 시간을 벌 수 있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올 가능성은 여전히 적고, 지금도 계속 적어지고 있지만. 로봇은 마지막 책의 표지를 흝어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중요도가 낮은 것으로 분류되어 맨 마지막까지 읽지 않았던 책이었다.


그 책은 100페이지가 채 넘지 않는 산문집 었다. 몇 권의 소설로 유명했던 작가가 생전에 써두었던 일기나 잡문들을 그 작가가 죽은 뒤 누군가가 묶어서 출판한 책이었다. 57권의 책 중 유일하게 로봇의 제작과 관련이 없는 책이었다. 그 어느 상황에서라도 로봇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는 책이었다. 로봇은 백 년 전의 일도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일기를 쓸 필요가 없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혹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글을 쓸 필요도 없다. 로봇은 필요가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로봇이 할 수 있는 일 중 필요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로봇은 그 책을 읽고 다시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어쩌면 이 책에 중요한 정보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확률은 아주 낮지만. 어차피 이 외에 다른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5

조사대가 두꺼운 유적의 천장을 조심스럽게 뚫고 들어갔을 때 그들은 잡동사니 가운데에서 서 있는 로봇 하나를 발견했다.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오랫동안 환기되지 않은 방의 공기는 텁텁했다. 로봇의 생김새로 봐서는 5세기도 전에 제작된 것 같다고 조사대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로봇의 머리 쪽 금속 덮개를 조심스럽게 해체하여 기억 모듈을 수거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이동식 분석 장치에 넣어서 기억에 접속을 시도했다. 너무 오래 전의 모듈이라 코딩되어있는 방식도, 사용된 언어도 낯설었지만 컴퓨터의 도움으로 곧 이 로봇의 기억에 접속할 수 있었다.


로봇의 기억 데이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거대한 전쟁과 그에 뒤따른 엄청난 규모의 파괴로 5세기 전의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신비에 싸여있던 시대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기억들을 기대했던 조사원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 로봇은 짧은 자신의 평생을 이 방에서 혼자 보냈다. 자기 자신 역시 자기 자신이 속한 시대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 탐사의 보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봇의 기억 속에서 조사대는 그가 읽었던 책들에 대한 내용을 발견했다. 거의 모든 책들이 로봇공학에 관련된 것이었다. 책들의 모든 내용이, 한 글자도 빠짐없이 저장되어 있었다. 모든 도판들도 다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과거의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발견이었다. 조사원들은 로봇의 옆에서 책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탓에 잉크가 다 날아가서 한 글자도 판독할 수가 없었다. 책들은 심지어 손을 살짝 대기만 해도 가루가 되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로봇의 전자두뇌는 너무 오랫동안 전원이 끊어졌었기 때문에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예전 과학기술의 한계다. 이 로봇은 이제 다시 깨어날 수 없었다.


기억 데이터를 꼼꼼히 살펴보던 조사대 한 명이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깔끔한 프로그래밍 코드로 압축 저장된 영상과 소리, 그 외 다른 센서들로 포집된 데이터 뭉치들, 그리고 로봇이 했던 분석과 추론 같은 모든 사고에 대한 로그들 맨 끝에, 이 로봇이 작동을 정지하기 전 마지막 한 시간 가량 동안 누군가가 직접 입력한 것처럼 보이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문자열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로봇의 시스템 방화벽을 뚫고 외부에서 접속한 흔적이 보이지 않아서 조사원들은 약간 당혹스러워했다. 마치 로봇이 마지막 순간 직접 자신의 기억 모듈에 접근, 자신만이 이해하는 언어를 사용하여 기록을 남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 문자열은 배터리가 거의 방전된 순간 전압의 부족이나 기타 오작동으로 인하여 스스로 생성된 오류 코드라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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