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6
첫 번째 집
독일에서 종종 서류를 작성할 때, 나는 태어난 곳을 서울이라고 적는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나는 사실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주는 엄마가 자란 곳,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셨던 곳, 콩나물국밥이 맛있고 막걸리를 시킬 때마다 다른 안주가 덤으로 나오는 술집들로 가득한 골목이 있는 곳이다. 나와 연년생인 누나는 함께 첫 생애의 3년가량을 외갓집에서 자랐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막내 외삼촌이 우릴 키웠다. 물론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고, 따라서 30년 전의 외갓집이나, 그때의 전주나, 그. 때의 막걸리 집 안주 인심이 얼마나 좋았었는지를 여러분들에게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두 번째 집
다들 서울의 목동을 알 거다. 대치동 못지않게 교육열이 높고, 노원 못지않게 아파트가 많은 곳. 하지만 묵동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 엄마와 아빠는 외갓집에서 우리를 데려와 중랑구 묵동의 어느 빌라에 들여놓았다. 아쉽게도 여러분들처럼 나 역시 묵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언젠가 나와 누나가 고등학생 쯤 되었을 무렵 아빠가 모는 차를 타고 온 가족이 어딘가로 향할 때 우리는 묵동을 지나친 적이 있다. 왕복 4차선의 차도 양쪽 가에는 차들이 빽빽이 주차되어 있었고, 좁은 인도 너머에는 3-4층 높이의 벽돌로 마감한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슈퍼, 식당, 정육점, 안경점, 약국, 안과와 소아과, 학원과 피시방의 간판들이 빼곡히 붙어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우리에게, 바로 이곳에서 너희가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살았다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이 동네가 기억이 나는지 물었다. 모든 엄마 아빠들의 비극은, 바로 자신의 자식들이 실제보다 똑똑하다고 여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세 번째 집
나의 세 번째 집은 노원구 상계동의 주공아파트 10단지였다. 1007동 1510호. 우리가 그 집의 첫 번째 주인이었다. 그 당시에는 노원과 강남이 동시에 개발되고 있을 때였다. 엄마 아빠는 먼저 강남을 가봤는데, 너무 언덕이 많아서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노원은, 북한산과 수락산에 껴 있고 중랑천이 아래에 흐르는 배산임수의 평지였다. 부모님은 두 번 고민하지 않고 노원의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그때 당시 분양가는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부모님은 아직까지도 종종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신다.
나의 기억 속에서는 이 노원의 집이 내 첫 번째 집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집에 대한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몇 개의 사소한 디테일들만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날 따름이다. 집 앞의 상가에 찡구짱구라는 이름의 분식집이 있었는데, 돈가스를 시키면 그걸 들고 온 배달원이 빨간 플라스틱 보온 통을 꺼내서 따끈따끈한 우동국물을 따라주곤 했다. 우리가 기다란 아파트의 복도 끝까지 세발자전거를 타고 갔다 오면, 현관 쪽에 앉아있던 엄마가 돈가스를 작게 잘라서 입에 넣어주었다. 나와 누나가 집의 베이지색 벽지에 잔뜩 붙어있었던 올록볼록한 엠보싱 패턴을 마치 딱지라도 떼듯이 벗겨내며 놀다가 엄마에게 혼났던 기억도 있다. 내가 보자기를 두르고 옷장 위에 올라가서 슈퍼맨 흉내를 내며 점프하다가 턱으로 미끄러지듯 착륙해서 병원에 가서 턱을 꿰매어야 했던 것도 이 집에서의 일이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수염이 나지 않는다. 건너 건너 16단지에는 서예학원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교원공제회에서 운영해서 교사인 엄마 아빠가 조금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는 연금매장이 있었다. 연금 매장 앞 호떡이 맛있었다. 우리 가족은 첫 차로 대우의 르망을 샀고, 노원역 앞에 미도파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네 번째 집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리는 옆 동네의 주공 14단지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1411동 501호. 분홍색 기와지붕을 가진, 5층짜리 낮은 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우리는 매일 열심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이때부터 나와 누나는 각자 자신의 방을 가지게 되었다. 원목 책상과 원목 침대가 들어오고 나니 방에는 남은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았다. 비록 엄마든 아빠든 밥 먹어라, 청소해라, 만화책 그만 봐라, 숙제는 다 했니 같은 내용를 내 얼굴을 보며 말하기 위해 노크 없이 불쑥불쑥 들어오긴 했지만 말이다. 문을 잠근다는 것은 명시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허락되지 않는 분위기였고, “노크하시고 들어오세요” 같은 말을 하기에 나는 아직 머리가 다 크지 않았다.
거실의 한쪽 벽면에는 소파가, 반대편에는 티브이와 티비장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가족이 공용으로 쓰는 데스크톱이 있었다. 나와 누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쯤부터 반년 정도 “퓨처키즈”라는 컴퓨터 학원에 다녔는데, 그곳에서 윈도우 탐색기에서 + 버튼을 눌러서 폴더 트리를 여는 법,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으로 플로피 디스크 라벨을 디자인하는 법 등등을 배웠다. 하지만 역시 우리의 관심사는 게임이었다. 영웅전설 1부터 5나 프린세스 메이커 1,2를 즐겨했다. 하루에 고작 한 시간 가량 허락된 게임 시간을 반으로 나누는 것은 가혹했고, 그래서 보통 우리는 게임을 같이 했다. 30분을 내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 한 시간을 같이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을 둘러싸고 나와 누나는 종종 다퉜다. 이를테면 나는 내 딸을 무사수행을 보내서 전사로 키우고 싶었고, 누나는 왕자와의 이벤트를 위해서 공부를 시키고 매력을 더 쌓게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는 누나가 나를 많이 울렸지만, 언제부터인가는 내가 누나를 울리는 일이 더 잦아졌다.
집 앞에는 놀이터와 운동장이 있었고, 단지 조성과 함께 심은 나무들은 이제 꽤 크게 자라 있었다. 봄철이면 송충이가 비 오듯이 떨어지는 특정한 종류의 나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집 바로 옆에는 상가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아나파약국, 아맛나분식, 노른자마트, 그리고 문화동네라는 이름의 만화책 대여점이 있었다. 누나와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이 만화책에 얼마 되지 않는 우리의 모든 용돈을 다 쏟아부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누나가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이 대여점의 1년 대여 실적 리스트에서 우리가 2위를 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문화동네의 주인아주머니는 그때 누나에게 지갑을 선물로 주면서, 내년에는 내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다음 해가 오기 전에 주인이 바뀌었고, 바뀐 주인은 그런 이벤트를 열지 않았다.
우리 집의 차는 르망에서 누비라로 바뀌었고, 나와 누나는 점점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줄었다. 외고에 진학한 누나는 야자에다 내신 학원, 수능학원, 논술학원을 다니느라 바빴고,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누나를 실어 날라야 했다. 나는 노원역 근처에 있는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우리 집에서는 마을버스로 15분 거리였다. 당시에는 시디 하나에 100곡이 넘는 음악을 담을 수 있어서 혁신적이었던 아이리버의 MP3 CD 플레이어에 패닉이나 에미넴, 우타다 히카루나 일본 애니메이션들의 OST를 넣어 담고는, 왠지 기분이 멜랑꼴리 해 질 때면 마을버스 대신 도보로 30분을 걸어 집으로 오면서 음악을 들었다.
사방이 아파트였던 노원은 그러나 조용하고 살기 좋은 동네였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부모님과 비슷한 나이였고, 어딜 가나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학원도 피시방도, 분식집과 문구점도, 만화 대여점과 4000원이면 컷을 받을 수 있는 미용실도 사방에 널려있었다. 월드컵이 열리고, 미도파는 증축과 리모델링을 거쳐서 롯데백화점이 되었고, 꼭대기층에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생겼다. 해마다 개봉했던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매트릭스 1,2,3, 그리고 해리포터 1,2,3 편을 나는 맹자, 갑부, 뱅크, 그리고 중기와 함께 꼬박꼬박 코엑스로 보러 갔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엄마와 아빠는 누비라를 팔고, YF 소나타를 새로 장만했다.
다섯 번째 집
누나가 먼저 대학에 들어가고, 다음 해에 나도 누나와 같은 대학교에 붙었다. 노원에서 학교까지는 꼬박 편도로 2시간이 걸렸고 나와 누나는 도저히 이렇게는 못 다니겠다고 불평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섯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응봉동 현대아파트 107동 1203호. 부모님은 아직도 이 집에 사신다.
집에서 대학교까지의 물리적 거리는 반으로 줄었는데, 통학시간은 겨우 30분밖에 줄지 않았다는 것이 응봉동 집의 미스터리다. 이 동네에 대한 내 첫인상은, 마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고 학생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전체 학창 시절을 노원에서 보냈던 나는 다른 모든 동네의 인구 구성이 노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듯했다. 마을버스는 힘들게 타고 내리는 관절이 좋지 않은 어르신들 덕분에 늦게 출발하기 일쑤였다. 논밭을 밀고 처음부터 반듯하게 계획되어 개발된 노원과 달리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을 조금씩 덮어쓰면서 개발이 진행된 응봉동은 어지럽고 시끄러웠다. 왠지 이 동네에 정을 붙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 생각대로 되었다.
부모님은 어떤 마법을 부리셨는지 나와 누나를 공부시키면서도 차근차근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 성공하여, 이 집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았던 모든 집들보다 더 비쌌고 더 컸다. 하지만 그래 봤자 31평이었고, 내 방과 누나 방은 여전히 침대와 책상을 제외하면 바닥에 한 명 앉아있을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더군다나 대학을 다니며 이리저리 알바를 하며 책이며 옷 등등을 사모으기 시작한 나와 누나 때문에 집은 점점 비좁아졌다. 그럼에도 집 값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비쌌다. 거실 쪽 베란다 창문 너머 오른쪽의 응봉산과 왼쪽의 중랑천 너머 시멘트 공장 사이로, 한 뼘 정도의 한강이 보이는데 그게 뭐라고 이 동은 이 12층부터 한강 조망권 프리미엄이 붙어서 천인가 이천만 원이 비싸다고 들었다.
나는 드디어 내 방에 내 컴퓨터를 들이는 데 성공했지만, 여전히 부모님은 노크를 하지 않고 방으로 불쑥불쑥 들어오셔서 그만 자라, 게임을 그만해라, 음악 소리를 좀 줄여라 같은 말을 하셨다. 나는 계속해서 거주 독립을 꿈꿔왔지만 실현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고, 그 기회는 군대를 다녀온 뒤에야 이루어지게 된다.
여섯 번째 집
전역을 하고 복학을 하면서 나는 대학 동기인 석우와 함께 녹두 거리 위쪽 꼭대기의 1. 5룸 방을 빌렸다. 보증금만 부모님이 내주시고, 월세는 우리가 버는 아르바이트비로 갈음했다. 길음에 사는 석우 역시 통학하는 것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부모님과 다른 공간에서, 잔소리와 간섭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부동산 할아버지는 "1층 같은 지층”이라는 아리송한 단어로 우리를 꾀었지만, 언덕 꼭대기에 있던 그 집은 다행히도 말 그대로 반지하의 단점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는 집이었다. 우리는 큰 방에 각자의 책상을 하나씩 놓고, 작은 방에 행거와 요를 놓아 드레스룸 겸 침실로 꾸몄다. 대학 동기들을 불러서 처음 파티를 했을 때 우리 건물의 옆 반지하방에 살던 직장인 아저씨가 시끄럽다며 우리에게 항의를 하러 왔었는데, 열린 문 너머로 사람들이 둘러앉아 패트 맥주며 소주를 마시는 풍경을 힐끔 보고는 오늘은 괜찮으니까 재밌게들 놀라고 하며 오히려 한 팩의 딸기를 주셨던 기억이 난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생각보다 다른 것이 많았고, 제일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음악 취향이었다. 석우는 한국 가요나 힙합을 많이 들었고, 그때의 나는 주로 한국 인디음악을 들었다. 눈뜨고 코베인, 달빛요정 역전 만루홈런, 마이 엔트 메리 정도였던 것 같다. 금방 우리는 이어폰을 끼고 각자가 각자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로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석우는 도자과 전공이었고, 작업을 위해서는 꼭 학교에 나가야 했다. 나는 시각디자인 전공이었고, 수업이 없으면 집에서 과제를 했다. 석우는 밤늦게 들어왔고 아침 일찍 나갔다. 나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늦잠을 잤다. 우리는 늦은 밤에나 종종 얼굴을 보았고, 부침개를 사 먹거나 맥주집에 가서 한잔 하거나 하는 정도의 시간만 같이 보냈다. 생각해보면 기묘한 동거였다.
당시의 녹두는 아직 고시생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나와 학원을 가거나 한 달치 식권을 미리 끊어서 밥을 먹거나 하는 고시생들과 동아리나 과 차원에서 녹두로 와서 술을 먹는 풋풋한 대학생들이 뒤섞여서 활기가 넘쳤다. 집에서 조금 위로 올라가면 황태해장국이 맛있는 식당이 있었고,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저녁 12시 정도까지 문을 여는 부침개 집이 있었다. 골목을 따라 술집, 식당, 디비디방, 카페, 그리고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보너스를 주기로 유명한 노래방이 있었고 골목이 큰길과 만나는 입구에는 롯데리아와 민들레 영토가 있었다. 샤기컷을 했을 때 한번, 그리고 베이비 펌을 했을 때 한 번, 나는 민들레 영토에서 알바 제의를 받았었음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바이다.
일곱 번째 집
졸업을 1년 앞두고, 나는 두 번째 휴학을 하고 안 단장과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 둘 뿐이었던 회사는 1년 뒤에는 8명가량의 직원을 두게 되었다. 24살이었던 나는 회사의 지분을 받고 공식적으로는 이사가 되었다. 일은 바빴지만 재밌었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은 회사의 위치가 응봉동과 가까워서, 도저히 나가 살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석우와 같이 살던 집을 처분하고 다시 부모님의 집에 들어와서 출퇴근을 했다. 다시 나가 살게 된 것은 이 회사에서 2년가량을 다니고, 졸업을 위해 학교에 복학하면서부터다.
낙성대의 안쪽 골목, 준아카데미라는 지은 지 오래된 원룸 오피스텔이 나의 일곱 번째 집이자,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혼자서 살았던 집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이유로 나는 2년 동안 이 건물의 방을 세 번이나 옮겨야 했다. 중간에 이 건물을 새로 산 집주인이 건물을 통째로 리모델링하면서 월세 세입자들을 모두 쫓아냈는데, 나는 반전세로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쫓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해 몇몇의 세입자들이 난민처럼 이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며 폐허 같던 공사판의 건물에서 살았는데, 졸전 작업 때문에 낮에는 나 역시 대부분 학교 과방에 있었던 터라 그렇게 큰 불편함은 없었다.
왠지 모르겠는 이유로, 이 준아카데미에서 나는 마지막에는 제일 큰 방에서 살게 되었다. 월세는 처음부터 변함이 없었으니 나에게는 이득이었다. 새로 막 리노베이션이 끝난 방에는 에어컨과 책상, 그리고 침대와 옷장, 드럼세탁기와 전기레인지 등이 옵션으로 달려있었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책상과 침대를 들고 들어왔다. 그래서 책상과 침대가 두 개였지만 그럼에도 방은 좁지 않았다.
이 집에서 나는 참 많은 사람들과 놀았고 많은 사람들을 재워주었다. 과방에서 야작을 하다가도 누군가가 아… 꼬막 먹고 싶다 하고 탄식이 섞인 읊조림을 내뱉으면 우리는 낙성대로 내려와 술집 장대포로 향했고, 그다음에는 다들 우리 집으로 기어올라왔다. 지금도 구글 포토 계정의 갤러리를 쭉 내려보면 그때 이 방에서 무방비 상태로 자고 있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 어딘가에 남아있다. 나는 아직도 이 사진들을 공개할 최적의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대로 꾸미고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천장의 한가운데 설치된 하얀 형광등이 들어간 천장등을 나는 청소할 때가 아니면 키지 않았다. 그 대신 이케아에서 구입한 주황빛이 도는 탁상 조명과 플로어 램프로 밤을 밝혔다. 매트리스와 이불과 베개의 커버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골랐다. 잔들과 그릇들도, 수저와 포크 나이프도, 그 외 자잘한 인테리어 소품들도 직접 골랐다. 스피커를 설치하고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일곱 번째 만에 드디어 나는 내 공간을 꾸밀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취향과 자유,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세입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물론 못 하나를 박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지만 이만하면 충분했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도 화장실 선반에 개어진 모든 수건들에 “무슨 등산회”, “축 개업” “제 몇 회 동창회” 등의 글자가 적혀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퇴직을 하신 엄마와 아빠는 아직도 일 년에 두세 개의 새로운 행사명이 적힌 수건들을 항상 받아오셨고, 집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온갖 원색 수건들이 넘쳐났다. 내가 다시 자취를 하러 나갈 때 엄마는 그런 수건들을 잔뜩 늘어놓으시고는 원하는 것으로 골라가라고 하셨다. 언제부턴가 그 글자들이 수 놓인 수건들은 나에게 경제적, 정신적 독립을 이루고 자신의 취향을 단단히 세운 성인이라면 화장실에 절대 두지 않아야 할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엄마의 수건 컬렉션들 중 일부를 받는 것을 거부하지 못했는데, 이 방의 보증금을 이번에도 부모님이 내주셨기 때문이었다.
여덟 번째 집
낙성대의 준 아카데미에서 나는 졸업을 하고도 일 년가량을 더 살았다. 다시 응봉동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게 된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몸이 다시 좋아진 뒤에 나는 민선과 결혼을 하고 독일에 가는 것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독일로 출발하기까지의 한 달 동안 우리는 부모님이 얼마 전에 새로 구매한, 부모님이 사시는 집과 같은 단지의 작은 아파트에 들어가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리모델링이 되어있던 집에서 우리는 일을 하고, 독일 유학 준비를 하고, 손님들을 맞아 작은 파티를 하면서 보냈다. 부모님은 아마 내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서울에 머물 것이라 생각하고 반쯤은 투자 목적으로, 반쯤은 나에게 한 채를 증여해주려고 대출을 해서 이 집을 마련했으리라. 하지만 응봉동은 대중교통도 좋지 않고, 동네 근처의 분위기도 그저 그랬고, 여러 가지로 젊은 부부들에게 호감을 살 만한 구석이라고는 별로 없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결혼하고 나서 집을 구한 곳이 부모님 댁과 너무 가깝다면 여러모로 부담스러울 것임을 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벨을 누르시고는, 김치를 했다, 오징어채 볶음을 좀 먹어봐라, 딸기가 신선해 보여서 두 팩을 샀는데 그 중 한팩을 주겠다며 들어와서는 일이 많아도 너무 늦게 자지 말아라, 리모델링 한지 얼마 안 되었으니 환기를 잘해라, 머리맡에 핸드폰을 두고 자지 말아라 같은 말을 하시리라.
아홉 번째 집
베를린에서 처음 구한 집은 서쪽 끝 슈판다우의 슈타케너 슈트라세에 있는 5층 높이의 건물 중 1층에 위치해 있었다. 에어비엔비를 통해 구한 그 집의 주인은 러시아인 가족이었다. 베를린에서 집을 구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고, 원래 계획은 이 곳에서 한 달을 머물고 구한 집으로 옮기는 것이었으나 결국 우리는 두 달을 머물게 되었다. 베를린에서도 슈판다우는 약간 무시를 받는 지역인 듯 하지만 우리에겐 모든 게 그저 이국적이고 베를린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집 밖 거리를 잔뜩 뒤덮은 개똥 무더기마저도!
베를린의 첫 여름은 꽤 무더웠지만 중정에 면한 집은 언제나 서늘했다. 습기도 잘 차서 겨우 두 달을 있는데도 복도 끝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진격해 나오는 곰팡이를 두 번은 지워야 했다. 옆집에는 아랍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네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언제나 중정에서 뛰어놀다가 열린 우리 집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가고는 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온 고양이에게 섣부르게 정을 주었다가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는 그 다음 일주일 내내 매일같이 창문 앞에서 야옹거리는 고양이에게 매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슈판다우에서의 일이다.
열 번째 집
베를린에 온 지 두 달만에 우리는 페이스북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서 집다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베를린 서쪽 끝의 슈판다우에서 남쪽 끝의 리히터펠데까지 터키인들이 제공하는 벤을 빌려서 이사를 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예산을 약간 초과하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지역보다 조금 더 외곽에 위치하고, 우리가 필요한 공간보다 많이 컸으나, 우리는 더 이상 집을 구하려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 태권도 관장이신 집주인은 조금 옛날 아저씨 스타일이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쏘 쿨했고, 전전 세입자였던 집주인의 아들 부부가 꽤 많은 세간살이를 놓고 간 바람에 기본적인 가구들은 물론 식기들까지 웬만한 게 다 구비되어 있다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끌었다. 그 뒤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이 집에서 2년이 조금 넘게 살고 있다.
이 집과, 이 집에 얽힌 기억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비록 이사를 앞두고는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너무 이르다. 무엇인가를 추억하는 글은 원래 이별한 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제대로 써질 수 있는 법이다. 어떤 디테일들은 잊힐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기억 속에서 제 멋대로 바뀌거나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겠지만, 그런 게 또 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언급하고 이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 집으로 이사하고 나서 우리는, 템펠호프에 있는 이케아에 가서 회색과 남색의 작은 수건과 크고 넓은 샤워 수건을 여러 개 샀다. 네이버에서 수건 개는 법을 검색해서 나온 몇 가지 방법 중에 제일 괜찮아 보이는 한 가지를 선택해서 여러 번 연습했다. 이제 수건 개기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지만, 나는 바싹 마른 단색의, 어떤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은 수건을 개어 욕실의 선반에 차곡차곡 포개 놓는 순간을 즐긴다. 이 곳에서 드디어 나의 삶이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는 감각이 손끝의, 그다지 부드럽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케아 수건의 올들을 통해서 느껴진다. 온전히 내 것이 된 삶은 생각보다는 까끌까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