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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창 응봉 최중원 Oct 21. 2019

열 명의 병정 인형들

나는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물해주셨던 열 명의 병정 인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보병 분대를 충실히 묘사한, 아이가 가지고 놀기에는 디테일이 섬세한 인형들이지요. 머릿결이 좋은 바비 인형 몇 개를 가지고 있었던 누나는 내 병정들에도 모두 여자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 손에 쌍안경을 쥔 든든한 분대장의 이름은 엠마였고, 기관총을 든 팔뚝이 굵은 사내는 엘리사였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누군가와 만날 때마다 상대방을 그 병정 인형들 중 한 명이라고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 병정 인형은 밤마다 진열장을 나와 침대 옆 탁자 위 알람 시계 앞에서 경계를 섰지요. 자신의 무기를 들고 당찬 포즈로 말입니다. 덕분에 나는 언제나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꿈도 거의 꾸지 않고 죽은 듯이 잠들었다가 매일 아침에 다시 살아났지요. 


제 병정 분대원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분대장 엠마와 부분대장 스칼렛을 나는 고등학교 때, 소총수 로지와 엘레나, 유탄발사기 사수 샤를로테를 나는 대학교 때 만났습니다. 사격 솜씨가 뛰어나 지정 사수 역할을 지명받은 아비게일, 기관총 사수 엘리사, 무겁고 큰 통신 장비를 등에 짊어진 통신병 진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하면서 만났구요. 나머지 두 소총수, 엘리자베스와 페이 린은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마 곧 만나게 되겠죠.


나의 이런 유희를 알았던 사람은 이들 중 스칼렛과 로지였는데, 이 말인즉슨 이 두 명은 내 집에 와서 내 침대맡에 서 있었던 각자의 병정을 보고는, 그 연유에 대해 물어봤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거짓말이나 둘러대기에는 소질이 없어서 지금 당신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구구절절이 다 말해주었지요. 둘 다 아주 즐겁다는 듯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중 한 명은 사실 기분이 좋지 않았었는지, 돌아가는 길에 제 병정을 몰래 가져가 버린 것이 아니겠어요.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날 저녁부터 내리 삼 일간 저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상대를 찾아가서는 인형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왠지 그 사람은 기분이 엄청 상해서는, 그렇게 헤어진 적도 있었지요. 아, 물론 인형은 잘 돌려받았습니다. 저기 침대 옆 탁상 위 보이시죠? 분대의 열 병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사이좋게 서 있지요. 제 병정을 가져갔던 사람이 스칼렛이었는지 로지였었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보다시피 제에게 연인이 없을 때에는 분대 전체가 진열장에서 나와서 탁상 위에서 함께 경계를 서며 제 밤을 지켜준답니다. 나의 병정들은 저렇듯 사이가 돈독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의 밤은, 만나는 사람이 없을 때가 더 안전합니다. 새벽녘에 어렴풋이 깨어났다가 아무 말도 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경계를 서고 있는 열 명의 든든한 실루엣을 졸린 눈으로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도, 앞으로 만나게 될 다른 사람들도, 이 병정들처럼 서로가 친하다면 좋을 텐데요.  


방금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었을 것인데, 보다시피 내가 이렇습니다. 내 생각을 잘 숨기지 못해요. 저도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 역시도 제가 누구를 만날 때 그 사람이 예전에 만났던 남자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남자들과 친해지고 싶지도 않지요. 저희가 가진 공통점은 모두가 특정 한 사람의 남자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뿐인데, 그렇다면 저희가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한 것 말고 다른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제 병정들은 과묵하죠. 말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 명 중 여덟이 한 번은 제 여자였던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나머지 둘이 제 여자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압니다. 사람과 병정은 다르죠. 그리고 저도 당신도 사람이고요. 제가 지금까지 너무 진지하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병정이나 경계근무나, 모두가 사이좋게 지낸다는 세계평화 같은 이야기들도 사실은 다 장난입니다. 제가 너무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방을 나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이 선택할 차례인 것 같네요. 둘 다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제일 끝에 서 있는 같은 포즈로 소총을 들고 서 있는 두 명이 바로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두 명이지요. 누구를 탁상 위에 남겨 놓아야 할까요? 당신은 엘리자베스인가요, 페이 린인가요?


잠깐, 화장실에 가고 싶다면 잘못된 문을 고른 것 같습니다. 그쪽은 현관입니다. 아, 가셔야겠다고요? 밖은 춥고, 금요일 밤의 거리는 너무 요란스러울 터인데요. 네, 이해합니다. 다 큰 어른이 병정놀이를 하는 것, 좀 유치해 보일 수 있지요. 엘리자베스나 페이 린이라는 이름들도 조금 취향이 올드한 것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는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네요. 그러면 조심히 잘 들어가시길 바라겠습니다. 배웅은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오늘도 병정 열명이 모두 다 같이 경계 근무를 서게 되었군요. 오늘 밤의 내 방에는 이제 나 빼고 아무도 없지만, 엠마와 스칼렛, 로지와 엘레나, 샤를로테, 아비게일, 엘리사, 진, 그리고 엘리자베스와 페이 린 덕분에 외롭지 않습니다. 다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분대장인 엠마에게 말하면 되겠지요. 어젯밤에는 왠지 좀 시끄러웠거든요. 이런저런 대화 소리들 때문에 몇 번이나 깼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대부분이 저에 대한 대화 들일 거라고 짐직합니다. 그들 역시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모두 한 번씩 제 여자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 밖에 없거든요. 사실 종종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궁금해서, 몇 번은 자는 척하고 엿들어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지만, 관뒀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고, 지금은 제게 없는 사람들인데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요. 하지만 그래도, 서로 친한 것은 보기 좋다손 치더라도, 경계 근무 중에 군가까지 부르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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