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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창 응봉 최중원 May 09. 2020

이사


이사를 앞두고 나는 짐을 정리하다 옷장의 제일 안쪽에서 아주 곤란한 물건들을 발견했다.


두번 다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않았어야 하는 유물을 발굴해버린 것이다. 내가 예전에 만났던 남자들의 기억들을 이렇게 소중히, 이런 보물함 같은 상자 속에 보관해놓았었다니.  분명히 결혼을 하고 막 이 집으로 이사왔을 때에도 나는 내 짐에서 이 작은 상자를 발견하고 당황했었다. 기회를 봐서 버릴 생각으로 이 깊숙한 곳에 일단 임시로 숨겨놓았던 것인데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남편은 바로 옆에서 무슨 노래인가를 흥얼거리면서 자신의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을 만 했다. 이 비좁고 채광도 좋지 않은 빌라에서 살기 시작한지 벌써 사년이 지났다. 의정부에 있는, 교통도 그리 좋지 않은 집이다. 우리는 열심히 저축하고, 이리저리 융통해서 대출을 받아 드디어 인서울 아파트 거주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강남도 잠실도, 목동도 마포도 용산도 아니고, 북서쪽의 응암동 산자락에 위치한 소규모의 단지였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정말 큰 성취였다.  나도 날아갈 만큼 기뻤다. 이 상자를 보기 전까지는.


하지만 별 일이야 있으랴. 남편과 나는 서로 사생활을 잘 간섭하지 않는 편이었다. 각자의 소지품도 잘 건드리지 않았다. 서로의 핸드폰 비밀번호도 모른다. 믿음을 깨는 일은 서로가 하지 않았다. 이 박스는 내 물건이고, 이 안에 무엇이 있던간에 남편은 내가 보여주지 않는 이상 이 물건에 손대거나 그 안의 내용물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 내 잡동사니들이 들어있는 이삿짐박스에 넣고, 적절한 타이밍을 봐서 적절하게 처리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적절하게 처리하는 것, 사실 그것이 조금 문제이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들은 너무 개인적이라서, 남편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라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예전에 미국 이베이에서 구매해서 배대지를 통해서 들여온 이 나무상자는 18세기 영국에서 보석함 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화려한 색들로 칠해져 있었고 상아로 조각된 장식들은 섬세했다. 누구든 그 상자를 본다면 대체 이 고풍스러운 함 안에 보관해야 할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열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면 안된다. 나의 미숙했던 사랑의 흔적은 남들에게 보이기엔 부끄러울만큼 조악하다.  아무래도 상자의 내용물을 꺼내서 검은 비닐봉지 같은데다 담은 다음에 묶어서 버려야 하겠지만, 너무 눈에 띄는 일일 것 같았다.  이사를 마무리하기 전까지 내가 남편  몰래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자기, 무슨 생각해?“

티셔츠를 개고 있던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이런, 너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었나 보다.


„ 우리 이사갈 집 생각하고 있었지. 내일 저녁에는 오랜만에 스테이크도 굽고 와인도 한병 딸까 ?“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야. 짐은 천천히 풀고, 일단 아파트에서의 첫 저녁인데 분위기도 좀 내보자구!"

남편이 내 뒤로 다가와 팔로 내 목을 두르며 말했다. 그의 숨결이 내 볼을 간지럽혔다.

„있지, 자기야. 우리의 꿈이 이루어졌어.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가지는 꿈 말이야.“

들뜬 목소리로 남편이 말을 이었다. „우리도 이제, 아이를 가져볼 때가 된거는 아닐까?“






이사는 이른 오후에 끝났다. 짐이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었고, 덩치가 큰 가구도 거의 없었다.

이삿짐 센터의 사람들도 자신의 박스들을 챙겨서 다 돌아가고, 집에는 빼곡히 쌓인 박스들과 나와 남편만  남았다.

우리는 외투를 걸치고 와인과 스테이크로 구울 고기를 사러 집을 나섰다. 단지 입구를 나서서 가파른 비탈길을 좀 내려간 뒤에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시장이 있었다. 정육점에 들러서 미국산 소고기 안심을 두툼하게 두덩이 썰어달라고 했다. 와인을 파는 괜찮은 가게가 보이지 않아 조금 해메었지만, 곧 작은 전문점을 발견해서 그 곳에서 프랑스산 레드와인도 한 병 샀다. 시장은 크진 않았지만 활기가 넘쳤다. 젋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특색있는 가게들과 작지만 세련된 식당들도 종종 보였다. 우리는 이 동네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박스를 뒤져서 팬과 기름을 꺼내고, 접시와 포크도 챙겼다. 20개 들이로 사놨던 작은 초도 두개 꺼내서 불을 붙였다. 그리곤 먼저 와인을 따서 한 모금씩 마시고는 함께 요리를 했다.  아파트의 부엌은 넓지 않지만 실용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두명이 식사하기에 넉넉한 식탁에 마주앉아 스테이크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그리곤 적당히 취한 상태로 우리는 침대로 향했다.


침대의 양 옆에는 아직 채 풀지 않은 박스들이 이단 삼단으로 쌓여있었다. 침대에는 매트리스만 올려져 있었다. 베게와 이불도 여기 어딘가의 박스 속에 구겨넣어져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는 커버도 씌여지지 않은 메트리스 위에 누워서 키스를 하고 서로의 옷을 벗겼다. 눈을 감고 남편의 두 손이 내 몸을 쓰다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이 인서울 아파트에서 새로 시작될 내 삶을 생각했다.  이 집에 채워넣어야 하는 것들, 내가 가져야 하는 것들, 내가 잊어야 하는 것들. 아, 잊지 말고 그 박스를 처리해야 하는데.


'우리 그것들도 좀 쓸까?“  남편이 약간 고조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찾을 수 있겠어?“ 짐을 싸면서 우리의 도구들을 본적이 있었나 생각하면서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눈은 여전히 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지 말고 나중에 찾자“

„응“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남편은 한 손으로 침대 근처에 세워진 박스들을 조금씩 열어보는 것 같았다. 내 몸을 만지는 손은 하나로 줄었고, 작게 바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여간 변태. 그렇지만 좀 기특하기도 하다. 나는 눈을 계속 감고 나른한 기분에 몸을 맡겼다. 그러면서 계속 생각했다. 내년쯤에는 차를 살 수 있지 않을까? 오년쯤 뒤에는 조금더 교통이 좋은 곳으로, 아니면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남편이나 내가 조금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한다면, 강남 입성도 생각보다 빨리 이뤄질 수도 있다. 우리가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내가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문득 나를 만지던 남편의 손이 멈춘 것을 알아챈 나는 왠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남편의 한 손에는 화려한 색깔에 상아 조각으로 장식된 박스가 들려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막 상자에서 꺼낸 듯한, 손가락 길이의 말라 비틀어진 소세지 조각이 들려있었다. 아니, 소세지처럼 말라 비틀어진 손가락이다.  나는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바로 침대 옆에 삼단으로 쌓인 짐들 맨 윗박스에 내가 그 작은 상자를 넣어놨었던 거다. 그리고 남편은 그 무식한 기구들을 찾다가 그 상자를 열어버린 것이고.


남편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입이 우물거리는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듯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리 줘봐요 그거“


내 말에 남편은 자신이 들고 있었던 다른 조각도 박스에 넣은 다음에 던지듯  나에게 건내주었다. 나는 하마터면 박스를 놓쳐서 그 안의 내용물을 내 맨 배 위에 쏟을 뻔 했다. 아무리 전 애인들의 손가락들이지만 지금 배에 닿는 것은 좀 그렇다. 무척 차거울 꺼 아냐.


박스 안에는 모두 다섯개의 손가락이 놓여 있었다. 모두 오른손 중지 손가락이다. 나름 인터넷에서 찾은 지식을 동원해서 이런 저런 처리를 해놓았기 때문에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손가락만 보곤 무엇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작게 이름표도 붙여놓았었다. 이 이름들을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남편을 만나기 시작하고 나서 부터는 한번도 열어본 적이 없었다. 진작에 처리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내 부주의로 결국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되어 버렸다.


나는 덜덜 떨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한번 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조금 더 내려 남편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이 상자에 손가락 하나를 더 담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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