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동생이 태어났어요.

샛방에서 동생이 태어났다.

by 다올

식구가 늘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식구가 살던 집에 동생이 태어났다.

우리가 살던 집은 서울 변두리다. 우리 동네 다다음 정류장이 경기도 역곡이다. 서울변두리 동네는 시골모습과 도시모습이 공존하는 곳이다. 저녁이면 따스함이 느껴지는 주황빛을 내는 고개 숙인 가로등이 골목을 밝힌다. 어둠이 내려앉은 동네 길엔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의 노랫소리에 이어 컹컹하고 개 짖는 소리가 나던 곳. 집 뒤에는 낮은 언덕이 있고 그 뒤로 작은 동산이 있던 동네.


동생이 태어난 것은 1973년 봄이다. 사실 나도 그땐 세 살 밖에 안되어서 모든 것이 선명하지는 않다. 어쩌면 내 머릿속 기억은 내가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의 상상력을 더해서 저장한 기억인지도 모른다.


동생이 태어나던 날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바쁘셨다. 원체 바지런한 분이셨다. 부족한 살림살이였지만 늘 깔끔하게 정리를 하셨다. 그 시절 살림살이라 해봐야 별것이 없었다. 집 자체가 넓지 않았으니까. 가장 바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부엌이다. 찬장 하나와 연탄아궁이가 있다. 아궁이엔 제법 큰 양은솥이 걸려있다. 못을 박은 벽엔 소쿠리 같은 살림 도구들이 걸려있었다. 그 작은 부엌을 지나면 작은 단칸방이 나온다. 방에는 캐비닛과 반닫이가 있다. 오른쪽 벽엔 창문이 하나 있다. 삐꺼덕 거리는 나무창틀 속에 반투명 유리가 들어있다. 겨울이면 밤새 성애가 그려지는 도화지가 되어주던 유리창. 습이 찬 유리창은 낙서장이 되기도 했다.


행정구역상 오류동이었지만 내가 살던 동네는 안동네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고만고만한 살림을 사는 사람들이 붙어사는 곳. 일종의 단층 연립주택이라고 해야 할까. 친척보다 더 가깝고 희로애락을 공유하던 사람들. 집안 사정을 내 집일같이 알고 부침개 하나도 나누어 먹는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몇 개의 살립집들이 붙어있었다. 마당 가운데는 처음엔 우물이 있었고 나중에 펌프로 바꿔졌다. 집안에 화장실이 없었으므로 화장실도 공용화장실이었다. 늦은 밤에 혼자 변소에 가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너무 늦은 밤이 되기 전 변소를 다녀오는 것은 필수였다.


어머니는 출산일이 다가오자 부엌에서 양은 냄비와 양푼을 모두 마당에 꺼내 은보다 더 반짝반짝 닦으셨다. 고운 쇠수세미에 분홍색으로 기억되는 비누를 묻혀서 박박 문지르셨다. 햇빛을 받은 냄비와 양푼에서 빛이 났다. 어쩌면 그 살림살이가 가장 빛나는 살림이었지도 모른다. 그때는 모든 물자가 귀했다. 그릇을 땜질해 주는 아저씨가 동네마다 다니면서 구멍 난 양은그릇들을 땜질해 주었다. 우리 집엔 은색으로 된 테이프가 있었는데 임시로 땜빵을 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집에도 한쯤은 다 가지고 있을 것 것이다. 이불도 햇볕에 널어 따스한 기운을 담뿍 담아 장에 넣으셨다.


그렇게 출산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봄날 순하디 순한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은 잘 울지 않았다. 나는 동생이 너무 이뻤다. 꼼지락꼼지락. 그 시절엔 조리원이 없었다. 대부분 집에서 조산사가 와서 아기를 받아 주었고 집에서 조리를 했다. 나를 낳고는 하혈로 고생을 하셨는데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효자였다. 잘 보채지도 아프지도 않고 하루하루 자랐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 해 겨울 어머니는 동생을 재워놓고 시장을 가셨다. 잠에서 깬 동생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려 했다. 두 살 많은 누나가 나는 동생을 끌고 기저귀가 있는 윗목으로 데려갔다. 기저귀를 풀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으니 새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나는 기저귀와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윗목까지 난방이 되지 않던 방에서 동생은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쩔쩔 매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신 어머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동생은 아랫도리를 다 내놓은 채 몸이 파랗게 질려있었고 나는 쩔쩔매고 있었다. 어머니는 서둘러 동생을 아랫목에 데려다 놓고 기저귀를 갈아주셨다.


그날 나는 어머니께 된통 혼이 났다. 내가 미워서라기보다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는 동생이 걱정되셨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뒤로는 나는 늘 동생과 함께였다. 이제는 함께 50대를 보내고 있다. 이젠 이런 이야기를 추억 삼아 이야기할 나이가 되었다. 동생도 결혼을 하여 삼 남매를 키우고 있다. 친정과 가까이 살아서 가장 본가에 자주 찾아가는 효자이다. 딱 52년전 그 때 춥게해서 미안하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