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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국민학교 1학년이 되다.

국민학생의 추억

by 다올

1971년생, 1978년 국민학교 입학, 1학년만 22반, 한 반 정원은 70명 내외


1978년 3월, 1540여 명이 나와 함께 서울 오류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은 상상할 수 도 없는 학생수.

지금 내가 사는 섬에는 학생들이 많아 봤자 30명을 넘기기 힘들다. 이웃섬은 학생수가 10명이다. 그마저도 올해 6학년이 5명 졸업을 하는데 입학할 학생은 없다고 한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다. 발간 나팔바지와 빨간 마이를 입고 왼쪽에 하얀 가제 손수건을 접고 접어서 옷핀으로 고정했다. 그 위론 두껍고 노란 비닐 위에 자수로 이름과 학년, 반을 새겨 넣은 이름표를 달고 나는 학교에 갔다. 요즘은 부모들이 택배처럼 학생들을 실어 나르지만 우리 세대는 보통 걸어서 다녔다. 형제자매가 있다면 함께 다니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주로 동네 또래들과 어울려 학교를 오갔다.

오며 가며 지금은 불량식품이라 불리는 아폴로를 사서 쭉쭉 긁어먹기도 했고 콩같이 생긴 과자를 오도독 먹으며 하교를 했다. 쫀드기는 최애 군것질 거리였다. 색도 맛도 그리고 식감도 다 달랐다. 내가 가장 좋아한 쫀드기는 오렌지 색에 설탕가루가 가득 묻어있던 스펀지 느낌의 수수깡처럼 생긴 쫀드기다. 그리고 당시에는 꿀이라 불리던 설탕물(호떡 속의 꿀을 생각하면 된다)이 들어있는 납작한 빨대처럼 생긴 쫀드기다. 겉에 커다란 설다 결정이 다닥다닥 붙은 눈깔사탕은 오래 먹을 수 있었으나 잘못하면 입천장이 까지기 쉬웠다.


입학을 하고 일주일 정도 엄마와 함께 다녔던 것 같다. 우리 때는 거의 한 달 정도를 운동장에 모여서 앞으로 나란히 차렷, 열중쉬어 등을 배워야 했다. 생각해 보면 8살 때부터 일종의 제식 훈련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 이 또한 일제의 잔재일터이다.

몇 개의 동요에 맞춰 율동도 했다. <숲솦 작은 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섰는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문두 드리며 하는 말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를 살려주지 않으면 포수가 '뻥'하고 쏜대요."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거의 50년 전에 배운 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열심히 불렀는지 알만하다. 심지어 율동도 다 생각난다. 이뿐인가. 주먹 쥐고 손을 펴서 손뼉 치고 주먹 쥐고...... 뭐 이런 노래도 열심히 불렀다. 애국가와 교가는 매일 불렀다.

요즘에 꼬맹이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노래와 율동을 날마다 시키면 다 아동 학대로 고발당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교단 위의 선생님을 따라 할 때 부모님들은 뒤에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계셨다. 율동을 하다 종종 엄마의 모습을 찾아 뒤돌아 보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율동과 간이 제식 훈련이 끝나면 학교 이곳저곳을 다니며 구경을 했다.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그땐 푸세식이라 변소가 밖에 있었다. 얼마나 찌릉내가 났는지 글을 쓰다 보니 그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남자아이들은 칸막이도 없이 그냥 줄을 서서 오줌을 쌌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칸막이가 있는 곳에서 볼일을 봤는데 안이나 밖이나 뒤처리를 위한 물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남자 소변보는 곳엔 늘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우리 교실은 어디에 있는지 잘 기억해야 했다. 그때 우리 학교엔 학생이 어림잡아 9,000명 정도 되었다. 교실 수도 엄청 많았다. 학교 건물은 커 보였고 운동장도 엄청 크게 느껴졌다. 학교 건물 뒤엔 동물원도 있었다. 비둘기, 공작새, 토끼, 칠면조 등 작은 동물들이 있었다. 방과 후에 동물들에게 풀을 주는 재미가 쏠쏠했다. 운이 좋으면 공작이 멋진 깃털을 펴고 부르르 떠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양호실, 교무실, 일주일에 한 번 저금을 하는 곳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곳은 아주 많았다.




입학식 당시의 모습과 비슷한 영상이 담긴 블로그를 찾았다. 영상은 80년대 지만 별 반 다르지 않다.

https://blog.naver.com/mbillionaire7/22217786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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