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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6 눈 내린 학교 운동장에 쓴 사랑 고백

눈이 소복히 내린 날은 사랑을 고백하기 좋은 날이었다.

by 다올

설 연휴 동안 곳곳에 폭설이 내렸다.

친정까지 오는 7시간 동안 멋진 경치도 보았다. 길이 미끄러워 잠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커다란 창으로 눈 덮인 밭을 보고 있자니 문득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내가 다닌 개봉중학교는 일대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남녀공학이었다. 총 열다섯 반이 있었고 남학생이 9반 여학생이 6반이다. 남아 사상이 남아있던 시절이라 남녀의 성비는 늘 남학생의 비율이 높았다.

제1회 입학생이자 졸업생이다. 공학이었지만 남녀 합반은 아니었다. 소풍 가기 며칠 전부터 일종의 프러포즈해야 했다. 선수를 놓치면 소풍 날 남학생들끼리 놀아야 했다. 남녀 반이 세 반 차이가 나다보니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한창 이성에 호기심이 많을 나이였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처럼 당당하게 대놓고 이성 친구를 사귀는 시절은 아니었다. 나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길을 걸을 땐 앞뒤로 1미터 이상 떨어져 걸었다. 특히 길을 걷다가 학교 친구들과 마주치면 아주 모르는 사이처럼 행동했다. 이렇게 수줍은 만남이 있는가 하면 당당하게 대놓고 사귀는 친구들도 있었다. 몇몇 커플의 사진은 졸업 앨범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함께 춤을 추는 사진. 게임을 하는 사진 속 두 친구는 활짝 웃고 있다. 모란보다 환한 웃음을 짓고 말이다.

늘 학교는 누가 누구랑 사귄다. 누구랑 누가 헤어졌다. 삼각관계다. 이런 소문들이 무성했다. 예나 지금이나 잘생긴 남학생과 예쁜 여학생들은 인기가 많았다. 여학생들은 남자 선생님을 짝사랑하기도 했다. 총각 선생님은 몇 분 안 되고 여학생은 삼백 명이 넘었으니 그 또한 치열한 경쟁이다.

이번 연휴처럼 눈이 내리고 운동장에 하얗게 쌓이면 학생들은 연신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선생님을 졸라댔다. 젊은 선생님 몇몇은 진짜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셨다. 그 이야기가 진짜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우리들은 그저 그 이야기에 푹 빠져 턱을 괴고 듣는다. 때론 그윽한 눈으로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옛 추억에 빠진 듯한 행동을 취하기도 하신다. 그 잠깐을 못 참고 우리는 빨리 이야기해달라고 선생님을 귀찮게 한다.

밀당의 고수인 선생님은 한창 고조에 이른 이야기를 뚝 끊는다.

“책 펴. 수업 하자.”

“우~~~”

야유를 보내보지만 어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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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 갑자기 아이들이 창문에 얼굴을 붙인다. 한두 명이 그렇게 하면 나머지 아이들도 우르르 몰려든다. 무슨 일이 있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밖을 내다본다.

하얗게 눈이 쌓인 운동장 한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다.

박ㅇㅇ, 이ㅇㅇ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크게 쓴 이름 뒤로 아름보다 훨씬 더 큰 하트가 그려져 있다. 우리는 부러워하기도 하고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용기 있는 남학생의 공개적인 사랑 고백 혹은 짝사랑.

그 커다란 백지 위 사랑 고백은 딱 50분짜리다. 다음 쉬는 시간이면 질투에 눈이 멀거나 장난꾸러기인 친구들의 발놀림에 다 지워지고 만다. 나도 의자 위 쌓인 눈 위에 머리글자를 써본다. ‘HJH♡BSS’라고.

우리의 십 대는 그렇게 그려지고 지워졌다. JH 야 잘 지내니?

건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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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에 남편과 나의 머리글자를 써봐야겠다.

'KSB♡BSS'라고 지워지지 않을 두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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