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골목'에서 만난 그 사람

<카프카의 골목길> 제3신

by 윤지형


그날, 내가 탄 지하철 객차 안은 정말 쾌적했다. 몸이 오슬오슬할 정도로 냉방은 잘 되어 있었고 서 있는 승객도 몇 안 되었다. 게다가 운 좋게 나는 빈자리도 차지한 몸이었다. 바깥은 찜통더위였다.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헉헉댔고 차들은 매연을 뿜으며 열기가 솟아오르는 아스팔트를 내달렸었다. 나는 막 거기를 탈출해 천국 같은 안가에 골인한 셈이었다.


내릴 역까지는 30여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며 이야기꽃을 피울 터였다. 느긋이 손가방에서 읽을 책을 꺼내는 나는 한 마디로 행복했다.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로 꼬아 포개니 모든 게 완벽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만의 독서에 빠져들기 전에 나는 반대편 승객들에게 잠시 눈길을 던졌었다. 당신들은 모를 거야. 지금 이 객차 안에서 누리는 내 30분의 행복, 세상의 어떤 권력자나 악당도, 아니 봉준호 감독의 ‘괴물’도 어쩌지 못할 이 행복을…….


그런데 책을 두 장도 채 못 넘긴 때였다. 내가 앉은 좌석에서는 좀 떨어지긴 했지만 띄엄띄엄 서 있는 승객들 사이로 한 걸인이 눈에 확 들어왔다. 30대 중반쯤의 남자였다. 그는 지하철 안의 걸인들이 으레 그러듯 구걸을 위한 짧은 사전 호소의 말을 막 끝낸 걸까? 내가 문득 그의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얼핏 그의 목소리를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양쪽으로 떨어져 있는 좌석의 승객들에게 빈손을 내밀었다 거두기를 반복하며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는 멀쩡했다. 시각 장애인도 아니었다. (청각은 알 재간이 없었다). 긴 머리카락은 며칠을 못 감았는지 기름때가 줄줄 흘렀고 말라빠진 몸으로 보건대는 배가 고픈 게 분명했다. 몇 끼를 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눈길을 도로 책으로 옮기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체 장애인도 아니고 저렇게 젊은 나이에, 볼펜이나 종이봉투 같이 팔 물건을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고 무슨 빚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손만 쑥 내밀고 있잖아. 호소문을 적은 종이 쪼가리라도 좀 준비해서 나오지……. 당신은 말이야, 도움을 청하는 사람으로서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어.’ (얼마 전에 만난 외팔이 영감님은 내가 1천 원을 적선하면서 도로 가져가시라고 한 껌 한 통을 기어이 내 무릎에 놓고 갔었다.)


이런저런 생각은 번개보다 빨리 명멸했는데 그 사이 젊은 사내는 내 앞을 지나갔다. 후우. 채권자 같은 그로부터 해방된 나는 또 생각했다. 오늘 나는 안 하기로 하는 거지만 누군가는 한 푼이라도 적선을 하겠지……. 그러고서 몇 초나 흘렀을까.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 사내였다.


그는 내 눈 앞에서, 우리 객차에서 사라진 게 아니었다. 다른 객차로 넘어가는 문 앞에 서서 사내는 이쪽을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제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답답하다는 듯 연신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미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욕설을 해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소리 높여, 아니 숨이 차게 울고 있었다. 내 가슴은 방망이질을 해댔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내 속내 말을 토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생각도 스쳐갔다.‘그래, 달려가 얼마간의 돈을 쥐어준대도 그가 받긴 할까……?’ 나는 내 자리에 묶인 채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냥 한 푼 줬으면 될 것을, 바보 같이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게 아니었는데. 내 다시는 이러지 않을 거야……. 때늦은 후회였다.


그가 사라진 지하철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장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은 돌아가신, 많은 세월을 인고의 삶을 사셨지만 늘 자애로우셨던 우리 장모님. 장모님 같았으면 앞뒤 가릴 것 없이, 터져 나온 울음으로 허기도 더해지고 넋도 나갔을 그에게로 가만히 다가가시지 않았을까? 그러고는 ‘이 사람아, 나이도 젊은 사람이 왜 이러는가.’ 하시며 그의 가련한 손에 쌈짓돈을 꼭 쥐어 주시며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어디 가서 시원한 국수라도 한 그릇 사 자시게.’


그가 손사래를 치든, 덫에 발목이 걸린 야생 동물처럼 악에 받쳐 이빨을 드러내든 말든 …….


‘당신들 이럴 수 있어?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단 한 인간도 안 도와준단 말이야? 정말 너무 한 거 아니야? 이러고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그의 절망에 찬 신음 속에 담겼을 이 같은 항의의 슬픈 목소리는 지금도 한 번씩 생생하게 들려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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