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골목길에서 만난
죽음이라는 ‘성(城)’
<카프카의 골목길 제2 신>
내게 죽음은 어떤 얼굴로 찾아올까……? 병? 사고? 이도 저도 아니면 자연-사(死)? 아, 그렇지, 행운의 자연사! 어제까지도 텃밭에서 일을 하고 저녁밥도 잘 드신 시골의 노모가 이튿날 아침에 보니 밤새 돌아가셨더라는 그런 행복한 죽음. 하지만 어떤 죽음이 내게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난 4월 막내 누이동생의 남편이 돌연 세상을 떠났다. 나이 쉰여섯, 심장마비였다. 그날 아침 나는 따뜻한 메밀 차 한 잔을 옆에 두고 느긋하게 대승경전의 최고봉인 유마경(維摩經)을 펼치는 참이었다. 전화가 왔다. “오빠……” 오랜 파킨슨병으로 다리를 못 쓰게 된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사는 대구의 누이동생이었다. 누이는 울고 있었다. 가슴이 덜컥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 거창읍에서 작은 사업을 하는 매제가 친구들과 즐거이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쓰러졌다는 전화를 막 받았다고 했다. 부산 해운대에 사는 나는 아내와 함께 누이가 일러준 병원으로 차를 몰고 달려갔다.
“여기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심장은 멎어 있었습니다.”
병원 응급실의 젊은 의사는 매제의 죽음을 이렇게 통보했다. 누이의 전화를 받은 지 3시간 만이었다. 매제는 제 아내와 두 딸에게 마지막 눈짓 한 번, 말 한마디도 못한 채 가버린 것이다. 누이와 나는 지하 영안실에서야 망자를 만날 수 있었다. 코로나 19로 응급실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매제의 누운 육신은 하얀 무명천으로 휘감겨 있었고 나는 그 머리 쪽을 가만히 들추었다. 그의 차갑게 창백한 얼굴은 거짓말처럼 평온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한번 만져 보거라.”누이는 통곡했고, 나는 잘 가라는 말은 차마 못 했다. 하고 싶지 않았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죽음의 가차 없는 리얼리즘 앞에서 나는 무력하고 또 무력했다.
20년 전 아버지의 죽음이 생각났다. 대구의 한 병원 4인 병실, 며칠 전부터 병상을 지켜온 어머니와 다른 식구들이 나를 남기고 저녁식사 차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다. 담도암 진단을 받은 지 넉 달 만이었다. 넉 달이 시한이라는 의사의 선고 그대로였다.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짧게 흡흡, 들이쉬는 모습을 나는 홀로 지켜보았었다. 내가 가족들에게도 간호사에게도 아버지의 죽음을 즉시 알리지 않은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길어도 5분 남짓할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아직 반쯤 뜬 두 눈을 감겨드린 다음 나는 부산서 출발할 때 챙겨 온 ‘티베트 사자의 서(書)’라는 책을 펼쳤다. 그리고는 티베트 사람들이 믿는 바, 아직은 그 영혼이 저 세상으로 온전히 가버리지는 않은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막 운명한 사람을 위한 그들의 주문들 중 하나를 성심껏 조용히 읽었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죽음이라고 불리는 것이 이제 그대에게 다가왔다. 그러니 이와 같이 결심하라. 아, 지금은 죽음의 때로다. 나는 이 죽음을 이용해 허공처럼 많은 생명 가진 모든 것들에게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리라. 그리고 그들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리라.’
공자님 말씀 신봉자에 무신론자이며 특히 개신교의 적잖은 목사들의 입에 발린 설교를 경멸해 온 아버지는 뒤늦게 불교가 아닌 가톨릭에 귀의하셨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예정된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아버지의 영혼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도무지 없다는 생각이 들 때의 그 막막한 무력감을 나는 기억한다. 내 허술한 공력으로 죽음에 임한 영혼을 이래저래 위무하려 드는 건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으로 여겨졌다. 내겐 어떤 정신적 원군이 필요했고 그게 바로 막 죽음에 처한 자를 위한 티베트인들의 주문 내지 기도문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죽은 자에 대한 정중하고도 인간적인 배려이며 어쩌면 최상의 배웅이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윤회를 믿거나 말거나 간에 20년 전 그때의 나는 그랬다. 나는 뭐라도 해야 했고, 그것은 죽음 앞에서의 망연자실,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안간힘이기도 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남동생의 죽음도 떠올려 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만에 아우도 저 세상으로 갔었다. 간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죽었다. 나이 마흔여섯, 아직 어린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둔 아버지였다. 간은 왜 그토록 망가졌던가? 술 때문이었다. 술은 또 왜? 서른 후반 즈음부터 아우는 시력을 점점 잃어갔었다. 망막색소 결핍증이라는 희귀한 불치의 병 때문이었다.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잘 쳐서 보컬 그룹을 만들어 밤무대 가수로 활동했던 아우였다. 완전 실명이 된 후에도 몇 년 동안을 룸살롱 같은 고급 술집에서 노래를 불러 돈을 벌었다. 열심히 살아보고자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아우는 졸지에 캄캄 맹인이 되었다. 선천성 맹인보다 후천성 맹인이 더 살아내기가 힘들다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아우가 맞닥뜨렸었을 공포와 절망은 급기야 밤낮으로 술을 불렀다. 중독자가 되어갔고 나날이 나빠진 간 수치로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기 일쑤였다. 제수씨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우가 결국 절명하고 말았다는 비보를 제수 씨로부터 전해 들은 것은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였다.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서 부랴부랴 올라 탄 부산 발 대구행 무궁화호 열차. 객차와 객차 사이의 시끄러운 공간으로 나가 엉엉 소리 내어 나는 울었다. 밤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도 울었다.
나는 아우가 누운 병원 영안실에서는 티베트 사람들의 주문을 읽지 않았다. ‘티베트 사자의 서’를 준비해 가지도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기차 안에서 나는 아우에게 말하고 또 말했기 때문이다.
아우야, 애통하구나. 하지만 이젠 너도 나도 눈을 떠야 한다. 바로 지금 무명(無明)의 눈을 뜬다면 우리는 삶뿐 아니라 대자연의 섭리로서 죽음의 진실도 얼마나 찬란한가를 비갠 후 무지개처럼 분명히 볼 수 있으리라……!
‘카프카의 골목길’, 그 첫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죽음이라는 ‘성(城)’이 먼저 내 앞을 가로막은 셈이다. ‘어둠과 안개에 둘러 싸여’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카프카의 산속 <성(城)> 말이다.
카프카의 죽음은 어땠던가. 1924년, 마흔둘의 나이로 그는 세상과 작별했다. 폐결핵 진단을 받은 7년의 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7년 후, 어머니는 10년 후에 사망했다고 카프카의 사후 연보는 전한다. 그러나 정말 가슴 아픈 일은 그의 세 여동생이 모두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1942년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나치 독일과 히틀러의 광기, 전쟁과 홀로코스트, 이런 폭력과 비극을 두 눈을 뜬 채로 겪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카프카의 때 이른, 아까운 죽음은 충분히 보상이 된다고 해도 좋을까? 그럴 것도 같다. 아니, 잘 모르겠다. 죽음이라는 난공불락의 성(城)을 둘러싼 ‘어둠과 안개’가 어느 날 일거에 걷히는 때가 오면 우리 앞에 환히 드러날 그 성의 본래 얼굴, 그 진실은 어떤 것일까, 오늘도 나는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