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투박한 언어만큼이나 사람들도 무뚝뚝하다. 웃는 얼굴은 보기 드물다. 관공서나, 우체국,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조차 친절하지 않다. 두 달 전 개인 은행 계좌가 필요해서 은행에 갔다. 은행 직원은 딱딱한 어조로 "비자는요?"라고 말했다. "코로나로 관공서에서 일이 늦어져서 임시 비자예요." "안돼요" "무턱대고 안된다 하지 말고 확인해 보세요" 나는 임시비자를 내밀었다. "무조건 당신은 안돼요. 할 말 없으면 나가세요." “뭐? 웃기네. 이 은행에 나와 남편은 20년째 고객이야!!” 라며 소리 질렀지만 화나는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임시비자여도 정식으로 은행계정을 열 수 있다고 명시되어있었다. 분명 인종차별적 대우였다.
그 일 후에 내 신용카드에 문제가 생겼다. 현금 인출기에서 돈이 빠져나오지 않았다.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가족 은행 계좌라 남편의 신용카드에도 문제가 있나 물어봤다. 남편은 얼마 전 슈퍼에서도 결제가 잘 되었다고 했다. 혹시 몰라 인터넷뱅킹으로 확인했다. 전기세, 핸드폰비, 물세, 난방비 등등 자동이체로 매달 빠져나가게 되어있다. 분명 나갔다는 내역은 있었다. 그런데, 바로 밑에 다시 계좌로 돌아 들어오며 부가세가 붙었다는 걸 알게 됐다. 황당했다. 당장 남편과 함께 은행으로 갔다. 전에 만난 은행 직원이었다. '확, 그냥 은행에 돈 다 빼버릴까?'
굳은 표정의 은행 직원은 나에게 서류 두 장을 보냈다고 했다. 서류를 확인하고 사인해서 다시 은행으로 보냈어야 했다며 되래 내 잘 못이란다. 두 번이나 서류를 보냈지만 답변을 얻지 못해 일방적으로 카드를 막았단다. 어떠한 언지도 없이 카드를 막은 직원에게 화가 났다. “난 서류를 받지 못했고 모르는 일이에요" "그건 당신 잘 못이에요 " "서류를 다시 제 발급해줄 수 있어요?" "아니, 더 이상 해줄 게 없어요, 집에 가서 서류를 찾아봐요."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감정을 참아내느라 입술을 꽉 물었다. 피 맛이 썼다. 다시 차분히 말해봤지만, 은행 직원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릴 뿐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왔던 우편물을 뒤졌다. 광고인 줄 알고 뜯어보지 않았던 우편물 속에 서류가 있었다. 내 잘못이었다. 은행 직원은 현지인에게도 그랬을까?
인종차별적 상황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셋째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한 차만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에 내 차는 이미 끝에 다다랐다. 그걸 보고도 맞은편 차는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내가 우선이었는데, 마주 오던 차가 기다려야 하는 게 맞았다.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창문을 내리고 나는 "당신이 후진하세요. 내가 먼저였잖아요"라며 큰소리쳤지만 그 운전자는 안하무인이었다. 대치 상태에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맞은편에서는 차가 뒤따라 들어오고, 내 뒤로도 차가 들어왔다. 외국인으로 피해 의식 속에 살아가서 남에게 피해 주는 게 싫었다. 기다리는 차를 위해 후진했다. 내 바로 뒤 차도 상황을 알고 천천히 자리를 내주었다. 무개념 운전자는 나에게 썩소를 날렸다. 그 사악한 미소에 독일어로 욕을 해주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럴 때는 한국 욕이 제일이다. "미친 삐리리, 돼지 삐리리 , 개 삐리리. 한국말은 역시 차지다.
독일인들은 코로나를 겪으며 동양인을 터부시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전부터였다. 난민들이 유입해 들어왔고, 무질서한 그 들의 삶 때문에 독일 사람들은 고충을 겪었다. 20년 전 내가 독일에 왔을 때만 해도 길을 물어보면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심지어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함께 가주었다. 은행 직원도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그 당시는 서툰 독일어로 말해도 잘 들어주었다. 요즘은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크게 이야기해야 들어준다. 그들은 외국인이라면 싸잡아 차별하기 시작했다. 시작된 인종차별은 코로나로 더 악화됐다. 나 이대로 독일에 살아도 될까? 독일이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