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슬픈 마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슬픔이 오래가지 않기 위해 무언가 해야겠단 생각이 섰다. 두 아들을 봐서라도 빨리 털고 일어나야 했다. 10년 동안 묵혀 두었던 면허증을 꺼냈다. 남편이 취직해서 자리를 잡은 지 몇 년 안되었다.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자동차 구입을 미뤄 왔다. 장 보러 가려면 집에서 20분 정도 걸어야 했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게 느껴졌다. 둘째를 태운 유모차에 장본 짐을 싣고는 밀고 끌며 집으로 갔다. 우리는 유학 생활부터 이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며 살았다. 우리야 그렇다 쳐도 아직 어린 두 아들은 고생이었다. 마음이 짠했다.
중고차를 사야겠다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남편과 의논 끝에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좋은 차를 만나게 되었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 떨리는 마음으로 운전 연수를 했다. 10년 만에 하게 된 운전에 긴장됐다. 손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곧 도로 주행도 연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아우토반도 운전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자 눌렸던 마음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운전을 하며 첫째 유치원 오가는 길이 수월했다. 장 보는 일은 더 이상 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태우고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어 좋았다. 첫째는 자동차에게 붕붕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 동물원, 수영장을 다닐 수 있어 감사했다. 점차 마음도 안정이 되어 갔다.
마음이 편해지니 6개월 만에 다시 귀한 생명이 찾아왔다. 생리 주기가 지나고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신 테스트를 했다. 선명한 두 줄에 설렜다. 임신 테스트기를 본 남편은 기뻐하며 감사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또 잃게 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전보다 남편도 나도 더 신경을 쓰며 조심 또 조심했다. 저번 임신 때에는 반기지 않던 친정엄마, 시어머니도 이번 임신은 받아들였다.
두 아들을 가졌을 때는 입덧이 심하지 않았다. 잘 먹어서 살찌는 게 도리어 고민이었다. 반대로 셋째는 입덧이 너무 심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게 수박이었다. 수박 반 통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거기에 별난 두 아들 녀석들을 돌봐야 하니 살이 쭉쭉 빠졌다. 얼마나 별난 녀석들인지 두루마리 휴지 10개를 다 풀어내 거실을 덮기도 하고 화장실 세면대 하수구에 비누를 처박아 놓기도 했다. 남편이 일이 없는 날에는 두 아들을 데리고 나가 에너지가 바닥날 때까지 데리고 놀았다. 그런 날엔 그나마 내 숨통이 트였다.
그 시기에 첫째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게 독일학교 입학 준비는 어려웠다. 선배 엄마에게 조언도 얻어 가며 준비했다. 그렇게 만삭의 임산부로 학부형이 됐다. 큰아들은 낯가림이 심했다. 새로운 환경에 극심한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그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나에게 전달됐다. 아이나 나나 혹독한 적응 훈련을 해야 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배 뭉침이 심했다. 태교는 못해도 아기가 편안함을 느끼게 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는 준비를 그렇게 해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