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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말로 달아나다

사물에 닿는 시 16 <발굽>

by 모카레몬



말이 달린다

말이 말을 떨구고

혀끝에서 떨어진 말이 땅 위에 뒹군다


말발굽이 지난 자리마다

낱말이 흩어지고

먼지 속, 한때 문장이었던 그들이

느리게 가라앉는다


발굽은 문장을 짓누르고

말은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린다

휘날리는 말을 줍는다

손끝에 닿기 전에

바람이 먼저 가져간다


길은 발굽으로 새겨지고

길 위에서 흩어진 말을 그러모은다


어느 말은 남아있고

어떤 말은 다시 떠난다


검은 말이 검은 말을 몰아가고

흰 말이 흰 말을 몰고 간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말을 놓아두었다


다시 말이 달아난다










<Creative Notes>


새벽에 창문을 열었습니다.

찬바람이 들이치고, 어제의 말들이 함께 흩어집니다.

말하고, 듣고, 보고, 느꼈던 말들이

바람을 타고 멀리 떠나거나

어느 말들은 머릿속에 남아 한동안 맴돌다 사라집니다.


시(詩)는 그런 말들을 붙잡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과 떠나가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바삐 적어둡니다.

그러나, 종이에 쓴 말이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방금 쓴 문장이 낯설어지고,

다시 읽으면 이미 저만치 달아나 있습니다.


말은 남기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떠나보내기 위해 써야 하나 봅니다.


사라진 말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믿습니다.

어디선가, 누구의 마음속에서 다시 되살아날 것입니다.


성경 속 인물은 언어로 하나님을 찾았고,

철학자들은 언어로 세계를 의심했고,

예술가는 언어로 보이지 않는 것을 쓰며 그렸고,

과학자는 언어로 보이는 것의 원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언어를 완전히 붙잡지는 못했습니다.

모세가 돌판에 새긴 율법도,

소크라테스가 남긴 변론도,

고흐가 붓으로 그린 빛도,

뉴턴이 서술한 만유인력의 법칙도

그들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 남았습니다.


말은 손에 쥘 수 없는 모래알 같아서

그 의미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남겨집니다.

떠난 뒤에야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요.


창조의 영을 가진 인간은 모두 시인이기에

시인이고 싶은 사람이 다시 한 줄을 씁니다.


언젠가 이 문장도 떠나겠지만,

어딘가에서 말발굽의 흔적이 남겨지겠지요.






**글벗이 되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창조하는 하루 보내세요!



사진출처> pixabay

#말 #언어 #창조 #종이 #발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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