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착 다음 날,
나는 청계천을 따라 걷고 있었다.
지하철 출입구 옆, 익숙한 카페와 가게들.
이 거리는 내게 낯설지 않았다.
몇 년 전, 이 근처의 사무실에서
몇 계절을 일했었기에,
모든 게 기억 속의 풍경처럼 다가왔다.
그때와 달라진 건,
내가 더는 일상이 아닌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
윤강현은 내 제안을 수락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걷기.
거리 두기, 익명성, 익숙함까지 갖춘 만남이었다.
“좋은 방법입니다.
오히려 제게도 도움이 돼요.”
그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에서도 침착했고,
무언가를 한 발 앞서 예측하는 듯한 어조였다.
“지금처럼 스스로 안전을 신경 쓰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전화는 자주 켜놓으세요.
지금처럼 필요할 때만 켜게 되면
제가 정보를 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망설였다.
“지금은… 그래도 이동 중일 땐 켜놓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청계천 물소리가 낮게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를 직접 보지 않으면서,
어쩌면 누구보다 깊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말했다.
“저는 군 소속입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 침투한 중국 스파이들을 추적해왔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여러 조직에 이미 침투했고,
기업 내부에도,
심지어 일부 공공 영역에도 손을 뻗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꾸며낸 게 아니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특히 제가 추적하는 조직은
자금을 매개로 국내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리고…
그 자금이
이번 사건의 핵심입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청계천 물결이 발밑에서 반사되어 흔들리는 그림자를 만들었다.
“당신은 그 자금에,
우연히 연결된 겁니다.
아니, 연결된 채 발견된 거죠.
가족이나 지인들과의 연결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보낸 일본 관련 메시지와 이미지,
효과 있었어요.
그들은 당신이 가족과 연락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잠시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곧 그는 덧붙였다.
“그렇다고 실제로 일본에 있다고 믿진 않을 겁니다.
그들도 나름의 정보망이 있으니까요.
당신이 아직 국내에 있다는 것,
그건 거의 확실히 알고 있을 겁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입니다.
그들이 당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 전까지,
우리는 최대한 많은 걸 파악해야 해요.
당신은 살아 있어야 하고요.”
그가 강조한 단어들이 머리 속에 남았다.
시간
정보
생존
“이번 자금은 단순한 ‘큰 돈’이 아닙니다.
전략 자금일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도, 특정 작전이나 프로젝트에 쓰이기 위해 준비된 자금.
그래서 조직이 이 정도로 크게 움직이는 거예요.”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내 지갑 안에 정확히 얼마가 있었는지.
그 숫자를.
입술 끝에서 단어가 맴돌았지만,
결국 삼켰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고맙습니다.
사실…
저도 너무 혼란스럽고 불안한데,
처음엔 그게 진짜인지도 몰랐습니다.
실수일 거라 생각했어요.
그냥… 호기심이었고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내부 보고를 받았는데,
예상 못한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놀랐어요.”
“…무슨 내용인데요?”
나는 묻고 싶었지만,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말씀드리죠.
정확히 확인되면.”
청계천 물결이 바닥을 스쳤고,
내 발자국은 더 조용해졌다.
나는 말했다.
“당분간 서울 시내에 있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게 지금으로선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오래 한 곳에 머물진 마세요.”
바로 앞에 지하철역이 보였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전 여기서 통화를 끊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좋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뚝.
통화가 끊기자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고,
전광판에 표시된 도착 시각이 깜빡였다.
2분 뒤, 열차 도착.
나는 서둘러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정리하고, 파악하고,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는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통제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소설:큐비트 프로토콜] 10.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