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취향 저격 당한 국내 추리소설
오랜만에 제대로 취향에 꼭 맞는 추리소설을 만났습니다. 근래 추리소설을 읽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무척 매우 아주 즐겁게 읽은 소설입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흡 to the 족하군요. 소소한 단점을 언급할 수도 있지만(할거지만) 그까이꺼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고 말입니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특허, 변리사의 세계는 저에게도 나름 익숙해서 추억이랄까? 향수 같은 것을 자극한 면이 있어서 무척 좋았습니다. 이미 십 년도 훌쩍 넘은 일이지만 한때는 굴려도 굴려도 퓨어함만 확인되는 이 장식용 머리로 특허라는 것을 내려고 안간힘을 쓴 적이 있어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하고 거지 같은 음이온이니 어쩌니 하는 걸 들먹이던 특허 초안을 쓰던 일을 생각하며 키득키득 즐거웠습니다. 어설픈 초안을 읽고선 변리사 사무소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미팅을 하고 질문에 대답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하여 참 민망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습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참 희한한 게 특허와 변리사의 세계는 이 소설을 풀어내기 위한 소재이자 장치에 불과한데 나름의 사전 지식이라는 것이 발동해서 읽는 즐거움을 억수로 마이 증폭되었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익숙한 소재와 설정을 사용해 디테일이 살아있는 소설을 쓰는데 전력했을 테고, 그동안 딱히 누구도 쓴 적이 없는 분야라 늘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어필하는 포인트로 작용하기를 기대했을 겁니다. 출판사도 마찬가지 입장이겠지요.
수많은 다른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알 바 아니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완전 제대로 작동한 것 같습니다. 읽는 내내 옛날 생각도 나고 몰입하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어서 아주 즐거웠습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껄껄...
어떤 소설을 만나서 느끼는 감정과 재미는 읽는 사람의 환경과 컨디션, 취향 등 많은 것에 좌우되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이야기의 재미는 물론, 주제의식, 완성도 등 많은 부분이 필요합니다. 추리소설의 경우는 애정하며 수많은 동일 장르의 소설을 읽어재끼는 골수 독자들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기가 그만큼 어렵습니다. 독자는 이런 과정에서 만나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자신만의 베스트를 계속 경신해나가기 때문에 현재 만난 소설과 기억 속의 최고 소설들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고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저같이 추리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독자에게 더 유리할 수도 있겠습니다.
태클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이런 설레발을 치고는 있지만 "산호새의 비밀"은 짜임새가 훌륭한 소설입니다. 일본의 본격 추리소설처럼 자로 잰 듯 짜 맞춘 소설은 오히려 매우 거부감이 드는 저에게는 차고도 넘치는 완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같은 경우는 이야기가 좀 허술해도 소설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만 훌륭하면 충분히 만족하는데 이 소설은 메시지도 좋았고, 심지어 이야기 자체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어쩌면 추리소설 전문작가가 아닌 저자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기대를 낮춘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생각해도 잘 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판을 잘 짰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상당히 익숙한 플롯과 전개입니다만 주인공의 직업과 배경 자체에서 차별화가 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플롯이 익숙한 것이 오히려 기발하고 기묘한 이야기 방식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저자가 이야기에 공을 많이 들인 것을 느낄 만큼 매우 꼼꼼한 전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은 이 부분은 대충 넘어가도 소설의 완성도에는 크게 영향을 안 주고 속도감이 더 있을 것만 같은 부분까지도 디테일하게 잡아주고 있어서 이게 장점인지 단점인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남녀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이 구닥다리 같은 느낌은 있지만 이 소설은 굳이 남성적인 소설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거대 기업의 이해와 권력, 국가기관이 얽힌 사건, 그 속에 등장인물들 각자의 욕망으로 복잡해지는 이야기와 그 속에 휘말린 주인공과 수사기관이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 등이 굵직하게 다가옵니다. 이런 부분들이 개인적인 제 취향에 매우 잘 들어맞았습니다. 제 편견일 수도 있지만 조금 어렵거나 복잡하게 느낄 독자들도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까칠한 리뷰어 본연의 역할은 해야 되기 때문에 굳이 단점을 언급해보자면, 초 중반에 문장이랄까. 표현 중에 뭐라 꼬집기 애매하고 미묘한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문장이 어색한 것인지 단지 저에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표현들이 있는 것인지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말하자면 기존 소설들을 읽을 때 느낄 수 없는 약간의 다름이랄까 그런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랄지,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누구를 만나도 초면에 바로 말을 놓고 편할 수 없는 그런... 그래서 그런지 중후반으로 가면서 그런 느낌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나름 적응을 했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다음 소설을 만나면 그런 느낌은 없겠지요.
다음으로 복잡한 이야기를 매우 꼼꼼하고 친절하게 잘 풀어주고 있는 저자의 스타일을 들 수 있습니다. 태생이 친절한지 꼼꼼한지 하나하나 설명하는 그 친절함 때문에 긴박한 사건임에도 속도감이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힘을 조금만 빼고 장르소설답게 이야기를 빨리빨리 진행시켰으면 하는 느낌이 살짝 1g 정도 있었습니다. 처음 추리소설을 쓰면서 이 정도 완성도면 저자가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마지막으로 취향의 문제겠지만 이야기의 결말 부분이 역시나 좀 길고 똑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게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제가 쓰면서도 헷갈리는데, 그냥 '범인은 너야!!!' 하고 잡히는 게 능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 그래서 누가 죽인 거지?' 하는 껄쩍지근함이 남았습니다. 아, 이런 것도 스포인가?(라고까지 쓰면서 절대 지우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시비를 걸었음에도 이 소설을 쓴 저자의 노력은 박수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 추리소설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차별화되는 지점이 생기기 위해서는 이런 소설들이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더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써주시기를 기대해봅니다. 앞으로 응원하고 후속작을 기대해 보겠습니다.(기왕이면 제가 좋아하는 SF를 써주면 더 좋겠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