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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유 Oct 08. 2024

어촌의 하루, 어케이션 마지막 날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


  닷가에서 지낸 아침마다 일찍 잠에서 깼다. 도시보다 투명한 공기를 뚫고 방안까지 들어오던 밝은 햇빛, 부지런한 갈매기 소리가 기분 좋게 잠을 깨웠다.


충남 태안군 고남면이 어촌 활성화를 위해 운영한 5박 6일의 어케이션(어촌체험 +휴식) 마지막 날, 아침 여섯 시 반에 마을 이장님의 안내 방송이 들려온다. “내일 마을 회의가 끝나고 마을에 새로 들인 전동차와 공용 트랙터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엽니다. 주민 여러분은 모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목소리로 들려주는 정겹고도 낯선 풍경이 마을에 퍼진다.


기도가 삶의 대부분인 바닷가 사람들이 모여 기원제를 하는구나. 기원제는 어떻게 하는지 그것도 보고 떠나면 좋았을 텐데. 마을 주민이 트랙터 앞에 놓인 돼지머리에 절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쉬움이 기지개처럼 펴진다. 다섯 밤이 이렇게 짧았나.


 느 집 대문 앞 소박한 꽃밭에 화려하게 핀 붉은색 나리꽃이 눈길을 잡는다. 소라 껍질과 밧줄로 엮은 어구도, 굴 껍데기가 가득 담긴 그물로 된 자루도 유난히 예뻐 보인다. 몇 시간 후면 그곳을 떠나는 게 아까워 아침 해무가 올라오는 바다를 앞에 둔 마을길을 걸었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어구를 손보는 동네 어르신과 인사를 나누었다. 꽃무늬 옷을 입고 갈 곳 없이 앉아있던 한 할머니는 그늘을 가리키며 이리 와 앉으라고 손짓을 한다. 시간을 느리게 흘려보내고 있는 노인에겐 말을 나눌 사람이 그리운 한적한 곳이다. ‘빈집이 많아. 사람이 죽어도 며칠 지나야 알아.” “에고. 아프지 마세요. 저 오늘 가요. 또 올게요.” 쓸쓸한 이야기를 듣고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담장에 그려진 벽화의 사진을 찍었다. 드문드문 색 바랜 벽화처럼 빛바랜 마을을 붉은 나리꽃처럼 화사하게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을 풍경을 눈에 담으며 골목을 걷다가 한 송이 해당화처럼 반짝이는 아이를 만났다. 주로 노인이 많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처음으로 본 아이였다. 집 앞에서 놀던 아이는 낯선 이를 보자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후다닥 돌아선다. 낡은 여름 내복에 반짝이 왕 구슬이 달린 분홍색 구두를 신고 집에서 잘라준 듯 삐죽삐죽한 앞머리가 너무나 귀엽다.



“꼬마야, 안녕, 이름이 뭐야?” “혜인이요.” “혜인이는 몇 살이야?” “여섯 살이요.” 답하며 손에 쥐고 있던 노란 금계국 한 송이를 불쑥 건넨다. 꽃을 건네는 바다 마을의 인사법인가? 생각지 않은 선물에 마음이 환하게 데워진다. 보답으로 과자를 가져올 테니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라 말했다.


300미터가량 떨어진 숙소로 달려가는데 내리는 햇볕은 따사롭고 스치는 바람이 등을 토닥이는 것처럼 다정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울고 싶을 만큼 행복한 기분, 못 잊을 아침이었다. 어느새 해무가 걷힌 바다의 윤슬이 눈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인에게 과자를 건네고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헤어졌다. 걸으며 밤사이 물이 빠져나간 갯벌을 바라보았다. 채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는 바다와 갯벌의 일. 모든 순환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집 앞에서, 눈앞에서 그러한 반복을 매일 지켜보면 무슨 일이든 덤덤해질 것 같았다. 무엇이건 견뎌질 것 같았다.


 짧은 머묾이지만 이곳에서 내 생각은 전보다 깊어졌거나 품어주는 마음은 더 넓어졌기를 바랐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태안군 고남면의 가경주마을은 내게 특별한 곳이 되었다. 바다의 먹거리가 나의 밥상에 오기까지 길목마다 담긴 수고를 생각하게 되었다.


통발을 깁는 간절함과 빈 그물로 돌아오는 어부의 주름처럼 골 깊은 시름도 아주 조금 헤아리게 되었다. 통발이나 그물을 던져둔 자리를 표시하느라 바다에 띄우는 망대를 보았었다. 흔들려도 떠내려가지 않고 바다 한가운데서 표식이 되어주는 망대는 길을 잃지 않게 지켜주는 삶의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이 지냈던 참가자들과 헤어지기 싫어진다. 서로 다른 사정으로 만나 어색하게 시작한 생활이었다. 어촌에 대한 호기심에 글감을 위한 색다른 경험을 찾아 나선 나를 비롯해 번 아웃 때문에 휴직한 젊은이, 퇴사나 귀어 등 새로운 진로를 고민하며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십 대부터 육십 대까지 가족이 아니라면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세대가 만나 가까워졌다. 단체 생활을 하며 서로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더없이 즐겁고 소중했다.


생태관광상품 개발을 위해 앞으로 그곳을 자주 찾을 거라는 C, 퇴사한 김에 국내 여기저기를 좀 더 돌아보기로 한 H, 작은 어선을 마련해 어촌에 정착하기로 한 K, 배를 태워 바다에 데려가 준 마을 주민 아저씨. 마을 앞 평상을 오갈 때면 쉬었다 가라고 자리를 내어주던 할머니. 어케이션에 참여한 사람도, 태안군 고남면의 주민도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참가자들이 가지고 있던 고민의 해답을 얻었을지도 궁금했다.



저녁이면 “참외를 사 왔으니 내려오세요,” “싱싱한 소라를 나눠 먹어요,” 서로를 찾기 바빴다. 모여 앉아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이름을 기억하려 애썼다. MZ 세대가 쓰는 줄임말을 듣고 깔깔거리며 웃기도 했다.


주택과 결혼 그리고 진로문제와 노후 걱정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고충을 들어주고 그저 응원했다. 다섯 밤 동안 바다의 삶을 짧게 경험하고 해지는 풍경을 길게 마음에 담고 떠나왔다.



한동안은 그곳의 파도소리와 해무에 가려진 섬 사이로 떠 있던 배, 거기 오르내리던 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릴 것이다. 쉽사리 잊지 못할 사람들이 생겼다. 무엇보다 우리는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아갔던 사람들이니까. 짧은 행복 긴 여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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