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간의 가정보육을 마치고 아이를 다시 어린이집에 보냈다. 집에서 지내던 처음 며칠간은 심심하다며 어린이집에 가고싶다고 성화를 부리더니, 막상 엄마의 껌딱지 노릇이 꽤나 할만 했는지 요즘은 등원할 때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엄마~ 엉엉. 안아줘~ 엉엉. 뽀뽀도!!! 엉엉.”
“으아앙~! 엄마 보고싶어!!!”
“집에 가지말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으앙~!”
어린이집에 도착하자마자 대성통곡하며 내 치맛자락을 부여잡는 아이. 이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큰 목청을 가진 우리집 시한폭탄이 떨어지자, 선생님 두 분이(한 명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듯) 결연한 눈빛으로 후다닥 달려 나온다. ‘어머, 세연이 귀여운 머리핀 했네~’ 혹은 ‘세연이가 입은 엘사 드레스 너무 예쁘다~’ 등 귀가 솔깃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아이의 관심사를 엄마에게서 자연스레 떼어 놓는다.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선생님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아이 뒤통수에 대고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멘트를 날렸다.
“세연아, 마스크 다 젖었으니 새로 바꿔 써!”
우리 아이는 네 살 때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필 그 해에 코로나19가 터졌다. 상황이 심각해질 때마다 등원을 멈추고 가정보육을 해온 게 벌써 네 번째이다. 적응을 할만하면 쉬고, 또 할만하면 쉬고, 흐름이 거듭 끊기니 아이 마음도 혼란스러운지 다시 등원을 할 때마다 자지러진다. 물론 한 서너주 지나면 친구 이름을 부르며 어린이집 현관을 향해 달려가는 의젓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적응하기까지 훌쩍이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엄마 속은 타들어간다.
물론 아이 탓만 할 수는 없다. 뼛속 가득한 모계 유전자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흔한 유치원 졸업장도 따지 못했을 정도로 엄마와 헤어지는 것을 거부하던 ‘엄마 껌딱지’이자, 숫기가 없어 또래집단과의 미니멀한 사회생활도 어려워하던 ‘부끄럼쟁이’였으며, 집안에만 들어앉아 꼼지락거리기를 좋아하던 극강의 ‘방안퉁수’였다.
아침마다 유치원 버스에 올라타지 않으려고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던 나를 등원시키기 위해 갖가지 묘책을 짜내던 모친과 선생님의 협공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게 그려질 지경이다. 게다가 유치원에 있는 그 짧은 시간이 어찌나 더디게 느껴지던지 ‘선생님, 언제 집에 가요?’만 재차 물어보며 버티던 나는, 생각해보니 지금 우리 딸과 똑같은 다섯 살이었다. 엄마와 떨어지는 순간 지옥문이라도 열릴 것처럼 두려웠던 기분을 빤히 아는 내가 어찌 아이를 탓할 수 있겠는가. 외려 나에 비하면 우리 딸은 얼마나 선전하는지, 또래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고 새 친구도 설렁설렁 잘 사귀는 붙임성 좋은 딸을 보며 이만하면 유전자 개량에 성공했지 싶다.
하원시간이 되어 딸을 데리러 간다. 아이가 바라던 대로 어린이집 앞에서 내내 기다렸던 것처럼 연기를 한다. 그러나 아이는 네 살 때처럼 순순히 속지를 않는다. 아침시간과 묘하게 달라진 엄마의 매무새를 위아래로 훑으며 영리하게 간파해 낸다.
“엄마, 머리 잘랐어?”
몇개월 만에 달라진 헤어스타일을 몰라볼 녀석이 아니다.
“아, 응. 엄마 잠깐 미용실에 다녀왔어.”
기다리겠다고 하더니 미용실에는 왜 갔냐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눈동자가 점점 커진다.
“아~ 미용실 바로 여기야. 세연이 낮잠 잘 때 잠깐 간거야.”
어린이집 바로 옆 자전거가게를 가리키며 나는 있지도 않은 미용실을 용케 만들어냈다. 아, 이 순발력.
“저기가 미용실이야?”
“응~ 자전거가게 위층에 미용실이 있어.”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는 ‘도장/열쇠’라고 쓰인 간판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올려다 보지만 술술 나오는 엄마의 아무말 대잔치에 일단은 너그러이 넘어가준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 뒷자리에 앉아 사탕을 까먹으며 이러쿵저러쿵 오늘 있었던 일들을 쪼매난 입으로 지저귀는 나의 아이.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종결은 언제나 ‘엄마 보고 싶었어.’란다. 친구들이랑 재미있었지만 밥 먹을 때 엄마가 생각났고, 낮잠 자려고 누웠을 때도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단다.
그런데 딸아, 그렇게 보고 싶었다면서 막상 마주하면 왜 엄마 말을 그리도 안 듣는 거니. TV 안 보여준다고 토라지고, 목욕을 안 하겠다고 고집 부리고, 어린이집에 가져간 시크릿쥬쥬 반지를 잃어버렸다며 엄마 탓이라고 억지를 부리다가 기어코 내 입에서 총알이 발사되게 만든다.
잔소리 한 사발 들이붙고 집안일을 하다가 주변이 조용해서 고개를 돌려보면 꾸지람에 풀죽어있는 아이의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이내 불러 껴안아 버린다. 애초에 일관성 있는 훈육은 불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세연이 이리 와 봐.”
“엄마 화났다며..”
우물쭈물 아이가 말한다.
“그래도 예뻐.”
“왜?”
“엄마 새끼니까. 말썽을 부리고 부리고 또 부려도 예뻐.”
아이의 표정이 금세 환해진다(뒤끝 없는 것 또한 날 닮았구나). 그러면서 한다는 말.
“나도! 혼내고 혼내고 혼내도 엄마가 좋아!”라며 햇살 같이 씩 웃는다.
아, 예뻐라. 이토록 설레고 황홀한 사랑 고백이라니.
어김없이 아이는 어린이집 앞에서 눈물 뚝뚝 흘리며 엄마 속을 미어지게 하지만 언제 또 이리 절절하게 나를 찾을까 싶어서 그냥 즐겨보기로 했다.
말썽을 부리고 부려도 예쁜 딸과,
혼내고 혼내도 보고 싶은 엄마는,
오늘도 함께 지지고 볶으며 깜찍한 하루를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