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빈 원고지 앞에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나는 왜 글을 쓰기로 했는가

by 베러윤

어제 아침, 조금 일찍 출근해 회사 도서관을 들렀다. 새로 들어온 신간이 있는지,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책이 들어왔는지 둘러보았다. 때론 그렇게 책장의 책들을 쭉 보고 있으면 생각지도 못한 책과 마주치곤 한다. 기획을 하는 나에게 책은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다.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 시대의 결을 읽을 수 있는 데이터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책장 앞에 서 있는 이 시간이 나는 너무 좋다. 의도한 탐색이든, 우연한 발견이든.


어제도 한참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한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바로 『독서력 수업』


처음엔 '이 분은 독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까?' 하는 호기심에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목차를 읽다 보니 초등학생 독서 교육에 관한 책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는, 이건 부모들을 위한 책이구나 싶어 덮으려던 찰나, 한 문장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빈 원고지 앞에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순간 나 자신이 떠올랐다.


나는 어릴 적부터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일기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고,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초등학교 글 모음 책자에서도 매년 내 글이 실렸다. 생각해 보면 책도 늘 가까이에 있었다. 머리맡에 책을 두고 읽다가 잠드는 게 습관이었고, 그 시간이 하루의 마무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지 않게 되었고, 글쓰기도 멈췄다. 고학년 때쯤이었을까, 아니면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였을까. 공부가 우선이 되자, 자연스럽게 책과 멀어졌다. 그 후로 '글쓰기'는 시험지 위 주관식 답안이나, 스펙을 위한 자기소개서, 간단한 SNS 캡션 정도로만 남았다.


그나마 내가 꾸준히 했던 건 다이어리였다. 긴 문장을 쓰는 건 벅찼지만, 날짜 옆의 작은 칸에 하루의 감정이나 기억을 한두 줄 적어두곤 했다. 그마저도 마음이 복잡할 땐 멈췄지만, 가끔 방 정리를 하다 옛 다이어리를 펼치면 그날의 내가 떠올랐다.


'아, 나 이랬었지.'


짧은 문장 하나로도 추억이 복원되는 경험이었다.


그러다 작년 가을, 본격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유는 단순하고도 분명했다.

나를 좀 더 알고 싶어서.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할 때 에너지가 생기는 사람인지.

그걸 알기 위해서는 조금은 멈춰서 내 안의 목소리를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였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한 글.


하지만 막상 쓰려하니,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다. 생각은 많은데 문장으로 풀어내는 게 어려웠고, 괜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됐고, 무엇보다 '쓸 게 없다'는 생각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블로그도 시작해 봤지만 며칠 가지 못했고, 브런치 스토리도 끄적여봤지만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시작한 게 스레드였다. 짧은 글이라면 덜 부담스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일 쓰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소재를 찾는 것도, 방향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는지 정작 나 자신도 모른다는 사실이 가장 혼란스러웠다.


그 시긴, 책을 읽다 보면 유독 자주 마주치는 문장이 있었다.


기록하라, 써보라, 글쓰기를 시작해 보라


책이든, 강연이든, 성장과 자기 이해를 이야기할 때면 결국 끝에는 늘 글쓰기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일단 써보는 것, 그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 미루지 말고 해야 할 일이란 판단이 있었다.


글쓰기 수업도 신청했다.


외였던 건, 수업의 핵심이 '잘 쓰는 법'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주제 선정, 문장력보다 더 중요한 건, 일상의 아주 작고 구체적인 순간들을 붙잡는 능력이었다. 눈을 뜬 시간, 출근길에 본 사람들의 표정, 커피를 마시며 들었던 감정, 퇴근 후 아무 말 없이 넘긴 드라마의 한 장면, 그 안에 나의 관심사와 태도, 감정이 모두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의 하루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렇게 '연습'이라는 마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기획안을 쓰듯 무언가 완성된 구조를 목표로 하기보다는, 단편적으로 생각과 감정을 붙잡는데 집중했다. 매일 쓰지 않아도 좋고, 길게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쓰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 글을 쓰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쓰는 게 익숙해졌다. 그리고 공저 프로젝트 제안도 받아 책도 출간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매일 글을 쓴다. 업무 메일을 쓰고, 보고서를 정리하고,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손이 얼어붙는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요즘은 매일 짧게라도 쓴다. 텅 빈 화면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은 어설퍼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한 줄, 한 문장, 나의 하루를 담아본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잘 쓰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두려워하지 말고, 쓰는 나를 매일 만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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