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생, 거스를 수 없는 AI 흐름을 마주하다

나는 어쩌다 기술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나

by 베러윤

나는 문과생이다. 물론 문과생 치고 사회보다는 수학을 좋아했지만, 과학과 기술은 유독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 내가 지금 기술의 한가운데서 일하게 될 줄,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는 언제나 기술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그리고 필연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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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중국 상해에 3년 정도 살았다. 복단대학교 대학원에서의 MBA과정과 짧은 인턴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올지 중국에서 커리어를 이어갈지 고민하던 그 시절,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기획자"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온라인 마케팅 회사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SNS채널을 만들고, 온라인 마케팅을 시작하던 시기었다. 내가 맡은 첫 프로젝트는 해외 유명한 담배회사의 영업용 앱이었다. 전국의 점주들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는 영업사원들을 위한 전용 앱을 기획하는 일. 그렇게 내 첫 기획은 '사람과 현장을 연결하는 도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tempImagesVOHo6.heic 내가 진행했던 서비스기획들


이후 대기업들의 온라인 마케팅을 여럿 맡았다. 트렌드를 읽어 온라인의 흐름을 파악했고, 고객의 마음을 흔드는 워딩을 고민했다. 웹페이지와 APP을 기획하고 개발하고, 사람을 모으는 경험을 설계했다.



tempImageC1uQaf.heic 내가 맡았던 클라이언트들


서비스기획자의 업무가 4년 정도 지나가니 슬슬 지겨움이 밀려왔다. 너무 쉬웠다. 반복되는 일들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오프라인 브랜드 마케팅팀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코로나의 시대가 찾아왔다. 오프라인 위주의 회사였지만 서비스 기획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TFT에 합류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기술의 문을 열었다.

그 문 너머에 있던 것은 메타버스였다.


메타버스를 기억하는가? 너도 나도 메타버스를 하지 않으면 마치 금방이라도 도태될 것 같았던 그 시기. 그 당시 대표님은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셨다. 코로나 초창기 이전부터 메타버스를 해야 한다고 외치셨다. 마침 시기가 딱 맞았다. 그렇게 나는 어린이들용 메타버스를 구축했다. 그다음은 NFT, Web3.0 그리고 자연스럽게 AI, 로봇과의 업무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 회사는 바뀌었지만 말이다.

tempImageCW0VAb.heic 내가 기획했던 플레이비의 'Funthing' 출처 : 보도자료

어쩌다 보니 나는 매번 누구보다 먼저 '가장 최신'이라 불리는 기술을 접했고, 그것을 '사람의 언어'로 바꾸는 일을 했다. 기술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도를 기획하는 일이 내 일었다.


누군가는 어렵다며 돌아서던 신기술들 안에서 나는 기회를 찾아야 했고, 사람 중심의 서비스를 상상했다. '기획자'로서의 나는 늘 기술과 가까이 있었다. 그렇게, 문과생이지만 기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기획자로서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지 끊임없이 실험하며 배워갔다.


그런 나조차도, AI가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때는 멈칫했다.


이건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기술이었다. 단순한 도구라 하기엔 사람처럼 사고하고, 사람보다 빠르게 요약하고, 기획의 영역을 위협하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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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가 Midjourney에 놀랐다면 기획자인 나는 ChatGPT에게 충격을 받았다. 기획 의도, 콘셉트 정리, 고객 인사이트 요약까지 몇 줄의 프롬프트만으로 내가 하던 일이 재현되는 걸 보며 처음으로 '기술이 내 자리를 가져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사람처럼 사고하고, 나보다 더 빨랐다. 그것은 기존 기술과는 결이 다른, 함께 일하게 되는 존재였다.



나는 기술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AI는 기술을 이해하는 정도로는 대응이 어려운 세계였다.

AI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고, 더 나아가 '잘 써야 살아남을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트렌드'가 아닌 '필수 생존 도구'로서 기술을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내가 쌓아온 경험과 감각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문장을 만났다.


"AI는 질문을 잘하는 사람의 도구가 된다."


기술이 더 빨라지고, 더 똑똑해질수록 문과생인 나의 역할도, 기획자인 나의 방식도 바뀌어야만 했다. 이제는 기능을 아는 걸 넘어서 기술과 공존하는 인간의 감각이 필요해진 시대이다.

AI는 이미 내 옆에서 일하고 있고, 앞으로 더 깊이 들어올 것이다.

중요한 건 기술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보다 그 흐름을 내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이다.


문과생도 괜찮다.

'잘'쓰는 사람이 아니라, '의미 있게' 쓰는 사람이 되면 되니까.


그리고 그 의미는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감각에서 출발한다. 기술이 아무리 똑똑해져도, 누군가는 여전히 질문하고, 해석하고, 연결해야 한다. 나는 그게 기획자의 역할이고 문과생의 힘이라고 믿는다.


AI시대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다루는 인간의 시선과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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