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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20. 2021

소장님이 고마워서 돈 찍는 기계를 발명했어요.

시골의 조현병

 지난봄 코로나 감염증 선별 진료소에서 검체 채취를 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한통의 전화를 받았었다. 모르는 번호이니 민원인의 전화겠지 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대꾸가 없다. 지역번호가 경기도이니 더욱 알 길 없는데 아무리 '여보세요' 해도 말이 없다. 재차 '말씀하세요' 하니 겨우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저기요, S 씨 아세요? S 씨 아시죠?"

당황스러웠다. S 씨 라니! 게다가 전화를 건 이는 잠에서 막 깬 듯 늘어지고 어눌하게 흐르는 목소리다. 내가 익히 아는, 정신과 약을 먹는 이들의 특징적인 말투이다.

"네, S 씨 제가 아는 분인데요, 전화하신 분은 누구세요?"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언니 바꿔 줄게요."

어안이 벙벙하다. S님이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 오래되어 잊고 있던 이름을 갑자기 듣게 되다니.

"여보세요? 소장님? 나 S예요. 나 기억나죠?"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세요? 제 전화번호 잊지 않으셨네요?"

"내가 소장님 전화번호는 외우는걸.... 나 여기 경기도에 살아요."

"네, 알아요. 아직도 거기 계셨네요. 진짜 오랜만이에요."

"여기 밥도 잘 나오고 선생님들도 다 잘해주고 좋은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알다시피 내가 담배를 피우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담배도 못 피우게 하고 여기 동생들 맛있는 것도 좀 사주고 싶은데..... 나도 술도 좀 사 먹고 싶고. 근데 여기서 선생님들이 못 나가게 해서 답답해요."

"아픈 데는 없으시죠?"

"나야 뭐 안 아픈 데가 없지. 소장님은 아직도 거기 계셔?"

"전 다른 데로 발령 나서 거기 떠난 지 좀 되었지요."

"어쩐지..... 근데 부탁이 있어요. 우리 큰오빠한테 가서 내 돈 좀 받아줘요. 큰오빠가 내 통장을 안 주잖아. 큰오빠가 내 앞으로 나오는 돈을 십원 한 장 안 주니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건 가족의 문제라서 제가 어떻게 개입을 해서 도울 수가 없어요. 아시잖아요?"

"알지. 근데 내가 너무 답답해서 전화한 거예요. 미안해요."

"저는 지금 코로나 선별 진료소 근무 중이라 길게 통화하기 어려운데 어쩌죠?"

"그래요, 그래요. 어서 끊어요. 고마워요."

십오 년 전의 기억이 한꺼번에 물밀듯 밀려들면서 급격히 피로해졌다. 함께 근무하는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선별 진료소를 나와 주차장 끝 느티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숨을 돌렸다. 까맣게 잊고 있던 S님을 생각하니 탄 냄비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그을음 섞인 물을 흔들어 마시듯 씁쓸했다.


 S님은 예전 근무지에서 만난 조현병 환자였다. 사납게 추웠던 어느 설 연휴 직전 날 이장님이 진료소를 찾아오셨다. 면에서 나온 기초수급권자들을 위한 선물세트를 돌리다 보니, 샛말 동네 꼭대기 OO네 집 뒤 산 바로 아래 폐가에 '미친년'이 들어와 산다고 했다. 그 '미친년'의 이름이 S였고, 그 마을이 S 씨 집성촌이어서 이장님 또한 S님과 먼 친척뻘이 된다고 했다. 이장님은 내게 '뭔가 도울 방법이 없겠느냐, 저렇게 그냥 두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일가친척이 가득한 마을이지만 그 누구도 도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시골에서는 집에 거주하는 조현병 환자는 흔하지 않다. 가족들이 남의 이목을 의식하여 시설에 입소를 시키거나 본인 스스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조현병 환자가 단 한 명만 있어도 온 동네가 다 알게 되곤 했다. 이장님을 통해 들은 S님의 병력은 참으로 딱했다. 어릴 때는 똑똑하기로 동네에서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시골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가사와 농사를 도왔다. 청년 시절 떠돌이 벌꾼의 천막에 자주 놀러 다니다가 임신을 했을 때 조현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S님은 출산이 임박했지만 육아가 불가능할 정도로 증상이 심했던 탓에 당시 나의 전임자로 마을에 근무하던 선배 진료소장님이 S님의 출산과 아기의 입양을 도왔다고 했다. 아기를 낳고 난 후에도 S님은 혼자 병원에서 퇴원한 후 마을을 배회하고 이웃에게 피해를 주었던 모양이다. 결국 S님의 큰오빠가 S님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고 했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 어디 지방에서 다방 주방에서 일했었다는 것 같아요. 다방에서 하도 사고를 쳐서 쫓겨났는데 갈 데가 없으니까 '기어 들어왔지.' S네 큰 오빠가 집이랑 밭 조금 있던 걸 팔아서 지금은 외지인이 이사 와서 집 짓고 살고 있는데 거길 가서 내 집이니 나가라고 행패를 부리니까 경찰을 부르고 혼이 났지. 어디로 없어졌나 했더니 결국은 다 허물어진 저 폐가에 들어가서 살고 있지 뭐야...."

이장님 말씀에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 역시 기온은 뚝 떨어지고 집은 허물어졌다는데 얼어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당장 그 집에 찾아갔다. 왕년 응급실 간호사 출신인 나는 겁이 없는 편이기는 했지만 주저하며 가까이 다가간 벽이 숭숭 뚫린 폐가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계세요? 안에 누구 계시요?"

소리 높여 부르니 안에서 모기 같은 작은 소리로 대답하던 S님.

"누구예요?"

"저는 저 아랫말 보건진료소 진료소장입니다. 여기 누가 계시다고 해서 찾아왔어요."

"보건소에서 왜요? 나 그냥 놔두세요..... 이렇게 있다가 사망해야 해요....."

"이장님께서 가보라고 부탁하셨어요. 집이 낡아서 쥐도 많을 텐데.... 저 들어가도 돼요?"

"여기 아주 별나서 못 들어오는데..... 괜찮으면 들어와요...."

낮인데도 캄캄한 집의 마루에 올라섰다. 문짝도 없는 방에 구들은 절반이 무너졌고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에 눈만 반짝이는 중년 여자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서웠다. 찾아온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나는 모르니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고 모른 척했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순간 스쳤다.

"여기 들어와 사시는지 얼마나 되었어요?"

"한 일주일 됐나.... 저 XX 같은 새끼가 우리 집을 뺏어서 내가 갈 데가 없어요..... 법에다 걸어야 되는데 내가 몸이 아파서 나갈 수가 없어요... 누가 변호사 좀 대주면 법으로 걸어서 집을 도로 찾아야 하는데."

춥고 굶주린 탓에 벌벌 벌 떨면서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자신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다시 들어 불을 붙였다. 담배를 붙든 손가락이 쉬지 않고 떨리고 있었다.

"여기 너무 추운데 이러다가 진짜로 큰일 나겠어요. 일단 진료소로 가실래요? 따뜻한 물로 좀 씻고 제가 라면이라도 끓여 드릴까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놓고 혀를 깨물었다. '어쩌려고 이런 사람을 초대하나.....'


 그녀는 순순히 나를 따라나섰다. 차에 있던 신문지를 뒷좌석에 깔아야 했다. 그녀가 움직이는대로 그녀에게서 검은 그을음이 떨어졌다. 그녀는 움직이는 쓰레기 더미 같았다. 머리는 산발이요 눈만 빼고 온몸은 그을음으로 새카맸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엉망진창이죠? 집이 다 허물어져서 한 데나 마찬가지라 너무 추워서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땠는데 구들이 다 무너져서 연기가 집 안으로 들어오더라고"

나는 그녀를 데리고 진료소로 와서 목욕을 하게 하고 내 옷을 챙겨서 입혔다. 외투도 하나 주었다. 그리고 라면을 끓여 주었는데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뜨거운 라면을 허겁지겁 먹는 그녀의 비참함에 돌아서서 혼자 몰래 울었다. 그녀가 라면을 먹는 동안 군 보건소 정신건강센터에 전화를 했다. 그녀를 도울 방법이 있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그때 막 신설된 정신 건강 센터는 아직 체계도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 경우에 대한 어떤 매뉴얼도 없었다. 그나마 정신 건강 센터의 정신간호 전문 간호사인 선배가 일단 장애 등급을 받을 수 있는지 면사무소에 알아보라고 했다. 다시 관할 면사무소 사회복지 담당자와 통화를 했고 정신 병원에서 전문의의 진단을 받은 후 3개월 이상 투약받은 병력을 가지고 장애 진단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받았다. 그녀의 형제자매들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모두들 고개를 외로 꼬고 거절했다. 슬펐지만 이해했다. 나였어도 자신 없었고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망설였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 믿었는지 나를 신뢰하였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가까운 시내의 정신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500문항이 넘는 MMPI 검사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일일이 질문을 읽어주고 그녀의 대답에 따라 답지에 체크를 하며 검사를 받았다. '이거 검사하다가 멀쩡한 사람도 미치겠네....' 그걸 하면서 내 솔직한 심정은 그랬다. 어쨌든 그녀는 지치고 있었지만 다행히 잘 따라와 주었다. 그녀에게도 살아야겠다는 본능은 있었던 것 같다. 검사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왔다. 그녀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이장을 졸라 그 집 마당에 마을 상수도를 놓아주도록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게 했다. 폐가의 뒷마당에 있는 우물을 퍼서 먹는 그녀는 매일 설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는 당시 진단명으로 '정신분열증' 즉 지금 흔히 듣는 '조현병'으로 나왔고 '일상생활에 전적인 도움이 필요함'의 소견이 덧붙어 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 간 데리고 다니면서 진료를 받고 약을 먹게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까지 하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폐가에 들러 그녀에게 약을 먹게 하였고 퇴근하는 길에 다시 들러 내가 보는 앞에서 약을 먹게 했다. 약을 꾸준히 잘 먹으면서 증상이 잘 조절되니 집 청소도 하고 혼자 산에서 퍼온 흙을 반죽해서 이겨 발라 뚫린 벽을 근사하게 메웠는데 기운도 장사였다. 무너진 구들은 마을 분들이 오셔서 대충 고쳐 주셨다. 불을 때면 연기가 방바닥으로 나오지 않고 굴뚝으로 나가는 것을 보니 내 속이 다 시원했다. 3개월 후 S님의 진단서를 면사무소에 제출하여 그녀는 기초수급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막 시작된 정신 건강 센터의 데이케어 프로그램에 매일 출석하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증상은 더 호전되었다. 집 주변 청소도 하고 예쁜 집과 마당에 꽃 그리고 엄마와 딸을 그린 그림을 벽에 붙이기도 했다. 마당에 풀을 매고 밭을 일구어 이것저것 심을 테니, 내게 먹을 만큼 뽑아가고 따가라고도 했다.


 "소장님,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데, 사실 내가 사흘 밤을 새워가면서 돈 찍는 기계를 설계했어요. 소장님이 나를 살려주고 이렇게 고맙게 해 줘서 어떻게 하면 은혜를 갚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차 기름값도 많이 들어가겠더라고. 그래서 소장님한테 한 달에 이천 정도만 주면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종이만 넣으면 진짜 돈이랑 똑같이 찍어낼 수 있는 기계를 설계했지. 근데 지난 장날 풍물시장에서 그걸 '쓰리' 맞았어. 누가 가져갔는지도 다 아는데 쫓아갈 수가 없더라고. 알잖아, 그런 중요한 기계는 나라에서 금지하잖아. 안기부 사람이 며칠 전에 나한테 말 거는데 내가 모른 척했거든. 아무래도 거기서 손을 쓴 것 같아요. 소장님, 내가 돈 찍는 기계 발명은 해놨으니까 지금 몸 아픈 것 좀 추스르면 설계도를 다시 그려서 그걸 철공소 갖다 주고 만들라고 하면 만들어 줄 거야. 그것만 성공하면 소장님 은혜 꼭 갚을게요. 미안해요."

어느 날 병원에 가면서 내게 그렇게 말하는 S님의 해맑은 얼굴을 보며 마치 어린 딸아이가 받아쓰기 백 점 맞았다고 하는 것처럼 대견스러웠다. 단지 아픈 사람일 뿐인데, 누가 다른 중병에 걸렸다고 하면 걱정하고 쾌유를 빌어주면서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천대와 냉대를 받으면서 사회로부터 강제로 격리당하는 현실이 의료인으로서 가슴 아팠다. 그렇게 S님을 정신 건강 센터에 데리고 다니면서 그곳에서 프로그램의 도우미 역할도 하고 연말에 발표회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작은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S님이 내 손을 떠나 정신건강 센터에 나가면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샛말 어르신이 진료소로 나를 찾아왔다. 간밤에 S님이 칼을 들고 자신의 집에 들어와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려 경찰에 신고했고 지금 S님이 경찰에 잡혀가 있다고 했다. 놀란 나는 관할 파출소에 전화를 했다. 무단 침입과 난동으로 신고를 받고 출동해 S님을 붙잡아 연행했다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받고 집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웃 어르신의 말씀으로는 S님이 집에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당장 S님의 집에 달려갔다. 폐가의 옛 주인이 쓰다가 버리고 간 빨간 철제 캐비닛 모양의 장롱으로 출입문을 막아 놓은 S님은 다시 처음 만나던 날의 상태로 되돌아가 있었다. 기가 막혔다.

"왜 문은 막아 놨어요?"

"소장님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사망해야 해. 온 동네가 다 나를 무시해. 이대로 희망이 없어.... 저 OOO 새끼가 여길 쳐들어와서 나를 성폭행하려고 해서 방문을 장롱으로 막았는데도 들어왔더라고. 그냥 놔두면 내가 죽겠다 싶어서 내가 먼저 죽여 버릴라고 그랬지.... 그 새끼가 경찰을 불러서는 적반하장으로 나를 신고했어. 아무리 아니라고 그래도 나 같은 여자 말을 믿나..... 또 안기부에서 나를 찍어서 괴롭히기 시작했어. 누가 그러더라고. 내 귀에다 대고 자꾸 얘기하니까 모를 수가 없지...."

약을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의 차이는 극과 극이었다. 다시 원점이었고 막막했다.


 그때 알았다. 남의 인생에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정신 건강 센터에서 알게 된 환우들과 어울려 술을 먹고 놀다 보니 돈도 금세 바닥이 나고, 게다가 약을 먹으면 증상이 조절되는 것이 그녀 입장에서는 에너지가 다운된다고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녀는 몸이 아프다면서 약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몇 칠씩 집에 돌아오지 않고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조절 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녀가 그렇게 되자 마을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칼이라도 휘두르면 어쩌냐고 하는 어르신들에게 '절대 그럴 일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조절이 잘 될 때는 막걸리를 받아다가 함께 어울렸던 몇 명의 남자들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증상이 심해지자 다들 빗장을 닫아걸고 외면하는 시골의 유약함이 슬펐다. 누구도 나서서 도와줄 사람이 없는 이곳이 나의 일터라는 것에 좌절하며 결국 내 손으로 그녀의 시설 입소를 주선해야 했다.


 내가 알고 있던 그녀의 모든 증상이 그녀의 시설 입소 사유가 되었다. 물론 내가 그녀를 도와 병 조절이 잘 되어, 자신이 나고 자란 일가친척들이 있는 이 마을에서 평안하게 어울리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랬었지만 결국은 그녀를 내 손으로 앰뷸런스에 태워 보냈다. 그녀는 장애 1급 진단을 받은 기초수급권자였기 때문에 시설 입소 절차가 원활했다. 그녀를 자립시키고자 내가 주선했던 모든 과정들이, 그녀가 요양 시설에 입소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편이 된 것에 씁쓸했다. 하지만 비록 세상과는 단절된 곳이지만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방황하고 천대받느니, 돌봄을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그녀에겐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자위했다. 내가 아는 장애인 시설의 모토가 '사회 속으로'이지만 그들이 사회 속으로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것 아닐까 싶었다.


 돌이켜 보니 그녀도 어느덧 칠순이 넘은 나이가 되었다. 그녀 앞으로 기초수급 급여가 들어오는 통장을, 지금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설에서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는 죽고 없는 큰 오빠가 자신의 통장으로 들어오는 기초수급 급여를 여전히 가로채고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그 옛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시골의 집과 땅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동의를 받지도 않고 임의로 S님의 도장을 만들어 처리했던 큰오빠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황폐할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나를 죽이려고 하고 사기 치려고 하고 자신은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항상 하던 그녀지만 타고난 쾌활한 성격과 유머를 즐기던 그녀와 함께 했던 날들을 돌아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무더웠던 여름, 출장을 다녀오니 진료소 마당의 풀을 매고 있던 그녀. 언제나 소장님에게 뭐라도 보답하고 싶다던 그녀. 그리고 그녀가 나를 위해 설계했다는 돈 찍는 기계의 설계 도면도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어 진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그녀지만 잠깐씩 보여 주었던 진실되고 순수한 그녀의 마음을 나는 사랑했었다. 영어를 배워 본 적이 없는 그녀가 즐겨 피우던 'THIS' 담배 갑을 보며 혼자 터득한 영어 파닉스로 그걸 읽을 때 얼마나 놀라웠던가!


 시골의 조현병 환자는 더 힘들다. 무지와 인식 부족 탓에 일가친척과 형제자매조차 외면하고 차별을 한다. 가족들도 그들을 부끄러워하며 숨기니 치료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우리는 누구라도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마음으로 위로하고 측은해하며 힘을 북돋아주고 이겨 내도록 도와야 한다. 그 어떤 병이라도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만큼 고통스러운 사람은 없지 않겠는가! 조현병은 조절하는 병이다. 암이 재발하면 안타까워하며 기도해 주고 위로하는 것과 똑같이 조현병도 조절이 잘 안되어 증상이 심해지면 집중 치료를 받으면 된다고 여겨주기를 바라본다. 부디 누구라도 어떤 병이라도 경계나 멸시, 천대와 차별을 하지 말고 안타까워하며 기도해 주기를, 그리고 정신 장애를 가진 이들이 사회 속으로 받아들여져 원활한 치료와 따뜻한 돌봄을 받게 되는 그런 날을 꿈 꾸어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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