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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Nov 22. 2021

시골 아버지의 겨울

아버지는 오늘도 하염없이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벌써 내년 건강 달력이 나왔다.  달력을 몇 부 챙기고 방문용 가방을 메고 출장에 나섰다. J어르신 댁은 오늘도 대문이 닫혀 있다. 2년 전 처음 발령을 받아 전임 소장님과 함께 가정방문 대상자 가정을 전수 돌아보던 날도 이렇게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다시 방문을 했을 때도, 그다음 방문일에도 대문은 굳게 닫혀 있고 J어르신은 집에 없었다. 전화도 드려 보았지만 한 번도 통화를 못했다. J어르신은 도대체 이 집에 사시는 분이기는 한 건지 궁금했었다.

자물쇠가 아닌 철사로 걸쳐만 놓았다는 것은 잠시 집을 비운다는 뜻이라는 걸 몰랐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J어르신이었다.

"혈압약이 다 돼서 타러 갈까 하고요"

"오실 수 있으세요? 거동 괜찮으세요? 집에 계시면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걷지는 못하고 내가 운동 삼아 자전거 타고 슬슬 가볼게요."


 전화를 하고서도 한참 만에 J어르신이 들어오셨다. 어르신이 내미는 꾸러미 안에 개업하면 증정하는 수건이 얌전한 상자에 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수건일까요?"

"소장님은 안경 안 쓰시나?"

"저는 안경은 쓰지 않습니다만"

"우리 아들이 서울 강남에서 큰 안경점을 해요. 이건 안경점 개업할 때 만든 건데 고급 수건이라서 하나 쓰시라고..."

그러고 보니 옷이며 모자는 낡고 허름한 작업복인데 안경만은 고급스러운 걸 착용하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버님, 제가 서너 번 방문했었는데 갈 때마다 안 계시더라고요. 어디 일 다니시나요?"

"일은 뭐, 늙은이가 할 수 있나요? 남의 일은 못해요. 그저 슬슬 농사나 조금 짓는 거죠."

"이상하게 제가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어서요"

"잠근 건 아니에요. 그냥 뭐 사람 없다는 표시를 하는 거지.... 멀리 어디 출타하게 되면 자물쇠로 잠그지. 근데 그냥 동네 돌아다닐 때는 철사로 걸어 두는 거예요. 누가 와서 보고 사람 없구나 금방 알게...."

그러고 보니 자물쇠로 걸려 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시구나..... 그런데 어딜 그렇게 다니세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그냥 자전거 타고 막 다니는 거예요. 갑갑하니까.... 혼자 심심하고... 일이 없으니까...."


 일 없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시다니 조금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진료기록부를 열었다.

"아버님, 아직 약 타실 때가 안되셨어요. 한 이십여 일 분이 남아있아야 하는데, 약이 없으세요? 혹시 약을 어디 잃어버리셨나요?"

 "아니에요. 실은 우리 마누라가 지금 서울에 가 있는데 주말에나 한 번 내려와요. 주말에는 진료소가 안 열잖아요. 그래서 내 혈압약을 가지고 갔어요. 내 약을 다 가져가서 내가 먹을 혈압약이 없어서 타러 왔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난감했지만 약이 없으시다니 하는 수 없이 혈압을 재고 혈압약을 한 달분 조제했다.

"아주 온 김에 마누라 것도 좀 지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버님, 죄송한데 대리처방 금지법이 생겨서 어머니께서 직접 오셔야 처방이 가능하세요. 어쩌죠?"

"그러게요..... 주말에나 어쩌다 왔다가 또 금방 가는데...."

난감해하는 어르신 표정이 막막해 보였다.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면사무소에서 가족관계 증명서를 한 부 떼어 오셔야 해요."

"그건 내가 할 수 있어요. 자전거 타고 다녀오면 되니까"


시골 어르신들은 서울 딸네 가서 몇 칠씩 가 있게 되어도 대문은 그저 집에 사람이 없다는 표시로 이렇게 끈으로 묶어 닫아 둘 뿐이다.

  가족관계 중명서를 떼어 온 어르신은 마라톤을 마친 선수처럼 숨이 차고 몹시 고단해 보이셨다.

"어머니는 왜 서울에 가 계시나요?"

차를 한 잔 드리며 물었다. 안경을 잡고 머뭇거리던 어르신이 씁쓸하게 웃으신다.

"우리 큰 아들이 지금 혼자예요. 아들이 하나 있고. 우리 며느리가 손주를 낳고 죽었아요. 임신중독증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지 그때 알았어요.... 근데 손주가 너무 낳는데 고생을 해서 그런지 약간 장애가 있어요. 아들은 출근을 해야 하니 그때서부터 할멈이 서울에 가서 손주를 키웠어요. 농사철 바쁠 때는 애 고모가 몇 칠씩 봐주고 일 끝나면 다시 서울 올라가고.... 그놈이 벌써 고등학교를 가게 됐어요. 그래서 집도 손주 학교 가까운 곳으로 옮겼어요. 장애인 학교에 다니거든요......."

"에고.... 저런... 그런 일이 있으셨구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생각하면 불쌍하지요 뭐... 덩달아 나는 홀아비 아닌 홀아비예요. 마누라가 맨날 서울 가 있으니까 혼자서 뭐 농사짓는 것도 힘들고, 마누라도 이제는 허리랑 다리 관절이 죄 망가져서 일도 제대로 못해요. 집에 내려와서 일 좀 하면 병원을 한 달씩 다니니까 점점 안 내려와요. 나는 뭐 그러니까 할 것도 없고 그냥 자전거 타고 운동 삼아 매일 돌아다니는 거예요."


 J어르신이 늘 집에 안 계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집에 들어앉아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심심하고 울적하셨던 모양이다. 특별한 목적 없이 집을 비운 채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고 또 도시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어르신의 눈빛이 말할 수 없이 울적해 보였다.

"먹는 것도 그렇고.... 혼자 집에 있으니 뭐 엉망이죠.. 겨울이 오는 게 겁나요. 겨울에는 일도 없고 추워서 아예 서울서 안 내려오거든. 딸이 반찬이나 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왔다 가고... 설이나 돼야 마누라 태우고 내려오겠지...."


 시골의 겨울은 이미 시작되었다. 김장을 마친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김장김치와 쌀을 싣고 가는 차에 함께 타고 도시로 가버린다. 때문에 시골의 겨울에는 타의로 홀아비가 되는 어르신들이 많다. 어머니들은 추운 시골집에 싫어서 도시의 자녀들 집에 가서 집도 봐주시고 살림도 도우시니 자녀들이 환영하지만 아버님들은 추워도 차라리 시골에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안 가신다. 갑갑하고 무료한 도시의 하루가 천년이라고 느껴진다고 하신다. 코로나 감염증 때문에 마을 경로당이 문을 열지도 않고 어디든 사람들이 모일 수 없게 되니 갈 곳 없는 시골 아버님의 겨울은 오나가나 징역살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시골의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달리지만, 소일거리가 없는 시골의 겨울은 너무나 길고 길다. 흐리고 추운 날이 지속되면 집안에 틀어박힌 어르신들의 우울감도 올라간다. 부디 올 겨울은 코로나 걱정 없이 경로당에서 매일 점심도 함께 지어먹고 화투도 치고 윷도 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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